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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호 초대展 “집으로...”, 장은선 갤러리, 중견 조각가 신달호 초대전

경영희 기자 | 기사입력 2017/11/27 [03:58]

신달호 초대展 “집으로...”, 장은선 갤러리, 중견 조각가 신달호 초대전

경영희 기자 | 입력 : 2017/11/27 [03:58]

* 2014년 1월 15일(수) - 1월 25일(토)
* Reception : 1월 15일(수) pm 4:00-6:00
* 전시장소 : 장은선갤러리 (종로구 인사동10길 23-8) www.galleryjang.com 
 
홍익대 출신 중견 조각가 신달호 선생은 조각을 통하여 유년의 기억들을 새롭게 재구성 한다. ‘환원’이라는 주제의식으로 대상을 최소화 하여 심플하고 함축적인 형상으로 작가가 지나쳐온 삶을 표현하고자 한다.  건축적 구조의 특성을 살리고 미니멀한 형태로 명확하고 간결한 작품을 보여준다.

▲ Restoration Image 11-01, 28x24x52cm Marble     © 강새별

 
신달호 선생의 ‘환원’은 모더니즘 조각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작가는 이러한 개념에 초점을 두어 조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요소로 작업을 한다.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인 구조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작가의 환원이라는 주제의식은 집이나 건축물을 암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집은 집의 감각적 닮은꼴로도 나타나고, 축약된 암시적인 형태, 사각형이나 원형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그 집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문이나 창틀과 같은 구멍이 나있다. 집에 난 창문은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들여다보는 창이며, 피곤한 현재를 치유 받고 위안 받는 창이다. 그리고 그 자체로 작가가 지나쳐온 삶의 계기들을 가름하는 경계이기도 한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나무는 작가 자신의 유년을 환기시켜주고, 자기 반성적인 계기, 주술적인 나무 이다.  양감,질감,구조,공간감만을 이용하여 대상의 최소화로만 환기시키는 심플한 구조와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형상을 통해서 이를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달호 작가의 심플하고 함축적인 작품으로 다양한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신작 20여 점을 보여준다.
 
조각가 신달호 선생은 홍익대학교 조소과 및 동 대학원 조소과를 졸업하였으며, 3회의 개인전과 한국현대조각전, 칭다오한중현대미술전, 한중현대미술아트페어, 파리 꽁파레종, 한-스페인조각 교류전, 말레이시아 아트엑스포 등 국내와 국외에서 수십회의 전시와 아트페어에 참여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호텔롯데월드, 한국은행 등 을 포함한 수십 곳에 신달호 선생의 작품이 소장 되어있다. 현재 홍익조각회부회장, 대한민국조각포럼 운영위원,한국현대조각가 협회 회원,목암미술관 학예연구원 ,서울시 미술작품 심의위원으로 있다.
 

▲ Restoration Image 12-09, 47x12x23cm, Copper     © 강새별


 
유년의 상징들, 집과 미루나무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신달호의 조각을 지배하는 주제의식은 ‘환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환원은 모더니즘 조각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다. 작가의 조각에서는 상당부분 그 개념에 기생하고 공감하는 것이 확인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모더니즘 조각의 세례를 받은 세대에 속하며, 그 개념을 자기화하는 과정 속에서 조각이 존재하는 이유를 묻고 있으며, 또한 그 존재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환원이란 말에는 소급시킨다, 되돌린다, 란 의미가 내재돼 있다. 즉 조각으로 하여금 조각이게 해주는 장르적 특수성에로, 조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본질적 요소에로 조각의 존재성을 소급시키고 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양감(속이 꽉 찬 덩어리)과, 질감(흔히 줄여서 물성으로 알려진 개념으로서 재료 고유의 물질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구조와 공간감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특질은 작가의 근작보다는 전작에 더 잘 드러나 있는데, 이를테면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인 구조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보인다든가, 재료 고유의 물질적인 성질을 극대화한다든가, 이질적인 재료들을 하나의 조각 속에다 조화시킨다든가 하는 식이다. 전작에서는 이처럼 근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재료와 구조에 대한 관심에 경도돼 있으며, 이에 대해선 소위 물성조각이란 말로서 개념화하고 범주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근작 또한 이런 모더니즘 조각개념에 대한 공감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전히 환원이란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주제의식이 드러나 보이는 양상은 서로 다르다. 기본적으론 전작이나 근작이나 재료의 물질적인 성질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서 대상을 최소한의 구조적 요소로 환원하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근작이 전작에 비해 더 심플해진 점이 눈에 띤다. 재료의 물성에 대한 관심에 비해 대상의 구조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더 증대돼 있으며, 이는 그대로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의 감각적 외관을 띠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근작에서의 특징적인 사실은 환원의 개념을 형식논리로만 취급하지 않고, 이를 내용적이고 의미론적인 측면에로까지 확대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근작에서의 환원 개념은 조각의 특정성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상을 추상화하는 과정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집이나 건축물을 암시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말하자면 집이나 건축물의 구체적인 대상을 그 최소한의 구조로 축약하고 환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는 계단이 놓여있고, 문이나 창틀과 같은 구멍이 나 있기조차 하다. 이렇게 조각의 특정성을 지향하는 환원주의 논리와 함께 대상을 암시하는 재현의지가 하나의 결로 짜여져 있으며, 이로부터는 일종의 서사성과 함께 풍경조각의 요소마저 느껴진다.
 
신달호의 근작에 나타난 환원 개념은 이처럼 조각의 특정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존재론적 의미마저 획득하고 있다. 즉 그 형상이 존재의 감각적 형상을 넘어 존재의 근원, 시원, 원형을 암시하며, 이로써 존재를 그 존재가 유래한 근원적 시점에로 되돌려놓는다. 그러므로 집이나 그 구조물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은 집 자체보다는 이러한 근원존재, 근원형상을 암시하는 일종의 상징, 메타포의 한 형식으로서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집은 집의 감각적 닮은꼴로도 나타나고, 최소한의 구조만으로 축약된 암시적인 형태로도 나타나고, 사각형이나 원형의 관념적인 형태로도 나타난다. 도상학적으로 사각형이나 원형은 완전한 형상을 상징하며, 흔히 만다라의 형상을 위해 곧잘 차용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 우주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에서의 집의 형상은 그 존재론적 의미가 근원형상에 맞닿아 있으며, 그 상징적 의미가 우주를 아우르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존재론적 의미는 작가의 유아기에로 소급되며, 나아가 작가의 존재마저도 넘어서는 아득한 과거, 원형적 과거에로 되돌려진다. 구조물 속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미루나무는 이처럼 작가 자신의 유아기적 추억의 저장고로부터 회상해낸 것이며, 존재론적 지평으로부터 추상해낸 것이다.
 
도심지에서는 보기가 어렵지만, 미루나무는 흔한 나무들 중 하나이며, 심지어는 가로수를 위한 수종으로도 친근한 나무였다. 아마 모르긴 해도 작가는 어린 시절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미루나무를 기억해냈을 것이고, 이를 자신의 정체성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닌 것이다. 실상 작가는 나무들 중 하나에다가 금박을 입혀 그 나무가 예사롭지 않은 나무임을 주지시킨다. 즉 그 나무는 작가 자신의 개인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나무, 자기 반성적인 계기로서 작용하는 나무, 자기 최면과 암시로서 작용하는 나무, 상실된 유년을 되돌려주는(환기시켜주는) 나무, 주술적인 나무인 것이다. 그 상징적 의미는 작가의 유년을 흔들어주던 요람에로 소급되며, 작가의 존재가 유래한 우주론적 자궁에로 소급되며, 세계의 근원신화(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신령한 나무)에로 소급된다. 이처럼 미루나무 자체는 비록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 존재론적인 의미는 보편적인 서사를 획득하는 것으로서, 보편상징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이처럼 신달호의 작품에서는 조각의 특정성에 대한 관심이 존재론적 관심과 만나고 있으며, 개인적 상징이 보편적 상징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공간구조에 대한 관심은 집과 미루나무로 나타난 대상적 모티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구체성을 획득한다. 그럼으로써 형식논리에 한정된 조각의 논의를 서사적인 논의로까지 확장시킨다. 집에 난 창문(일종의 투각의 형식을 빌린)은 작가의 조각이 이러한 서사와 자기 반성적인 계기에 맞닿아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 창은 작가가 자신의 유년을 들여다보는 창이며, 피곤한 현재를 치유 받고 위안 받는 주술적인 창이다. 그리고 그 자체 작가가 지나쳐온(건너온) 삶의 계기들을 가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 경계의 문턱에는 어김없이 작가가 겪었을 여러 형태의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매끈하게 마무리된 구조물과 함께, 그 표면에 여러 비정형의 스크래치가 각인 된 구조물을 대비시키기도 하고 중첩시키기도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때의 스크래치를 그저 조형적인 한 요소만으로 지나칠 수도 있지만, 이는 정체성과 동격으로 나타난 집(집은 정체성을 상징한다)과, 그리고 작가의 유년을 암시하는 미루나무와 중첩됨으로써 그 의미가 증폭돼 보인다. 그러니까 스크래치는 작가의 무의식의 지층에 새겨진 상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남긴 상흔, 치유 불가능한 상처의 흔적인 양 보이는 것이다.
 
신달호는 자신의 조각을 통해 조형적 환원과 의미론적 환원을 수행하고, 이를 자신의 조각 속에다 통합시킨다. 즉 작가의 조각은 구조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장르적 특수성에 한정된 모더니즘 조각의 형식논리를 떠올리게 하며, 집과 미루나무, 창문과 스크래치(상처)와 같은 암시적인 모티브의 도입으로 인해 서사적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형식논리와 서사적 논리가 충돌하는가 하면, 추상의지와 재현의지가 대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론 이 계기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겉돌기보다는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 내포적인 성질을 획득한다. 무엇보다도 대상을 최소한으로만 환기시키는 심플한 구조와 암시적이고 함축적인 형상을 통해서 이를 실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사를 넘어선 유년의 보편적 상징이 읽혀지고, 그 상징에 연유한 존재론적 근원형상에 대해 공감하게 된다. 2006년 10월 제2회 개인전 서문(전시장소 : 인사동 큐브스페이스)
 

▲ Restoration Image 12-09, 47x12x23cm, Copper     ©강새별

 
[강새별 기자] green@sisakorea.kr , green@lull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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