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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현 개인전 ■

문예당 | 기사입력 2005/08/25 [10:44]

유재현 개인전 ■

문예당 | 입력 : 2005/08/25 [10:44]


■ 유재현 개인전 ■


-흔들리는 숲  남아있는 들-





▶ 노암갤러리

▶ 2005.8.31(수) ~ 2005.9.6(화)

▶  110-290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33

              02-720-2235_6  





■ 변화와 갈등, 그 사이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 ■



“한국화가 현대적인 조형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두드러진 특징 중에는 전통적인

기법의 존중보다는 강한 개성의 표출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작가가 의도하는 조형상의 효과를 위해서는 필법과 채색법, 나아가서 화면의 구성까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현대 한국화가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문제시 되었던 점도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회화양식으로서의 가치관과 현대적인 조형의식으로의 전환 사이의 갈등이다.

이러한 이원적 갈등의 구조는 하나로 종합되는 추세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이 아울러 개혁되어야 한다.    

                                    -1회 개인전 카다로그 중에서 작가노트 일부-

  

이 글은 유재현이 오늘날의 한국화를 진단하고 나름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그가 추구하는 회화는 “서구적인 기법이나 회화관에 말려들거나 낡은 스타일에 안주해

버리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독특한 회화세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이고

“이러한 기저위에서 전통성이 강한 묵(墨)에 근거를 두고 새로운 스타일을 형성해 나가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전통성과 현대성을 고민하는 일은 오늘날 한국화가들에게는 마치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되어있는데, 떨쳐내기 어려운 강박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강박증은 한국화를 비평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관련해 몇 마디를 덧붙이자면 나는

오늘날 한국화는 세 가지 개념적 범주: 정(停) 변(變) 화(化)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매너리즘’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를 꾀하기는 하지만 기존의 동양화 내지

한국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향이다.


나머지 하나는 마치 화학작용을 일으켜 전혀 다른 무엇으로 변화된 것이다.

세 번째의 경우, 현재까지는 이렇다할 개념적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간과할 수 없는

작업들이다. 한국화 비평도 이 세 가지 개념적 범주로 분류 할 수 있겠다.

한국화를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동시대적 미학의 반영과 투영이

이루어져 지금보다 훨씬 풍부한 담론을 형성해야 하는 것인데, 단지 양식적으로 한국화의 범주를

한정짓는 태도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유재현의 회화는 이 세 가지 개념 가운데 두 번째 ‘변(變)’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통에 좀더 비중을 두고 변화를 모색하려는 입장에 서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의 회화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묵(墨)보다는 필(筆)이 주를 이룬다.

그가 1회 개인전 때 “전통성이 강한 묵(墨)에 근거를 둔다”고 했을 때

그 묵(墨)이란 발묵(潑墨)이나 파묵법(破墨法)보다는 꼼꼼한 점묘에 의한

적묵법(積墨法)에 가까웠다.

묵점과 색점을 혼용하여 점획들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바탕화지의 흰 여백이

어우러졌던 것에 반해 이번 전시에서는 색점과 흰 여백이 사라지고 대신

바탕을 색(‘색점’이 ‘색면’으로 확장되었다.)으로 칠한 후

그 위에 필(筆)이 가해진다.

점묘에 의한 적묵법으로부터 사물의 특징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필법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초벌필묵 위에 색이나 호분이 올려지거나 부분부분 조각 배접을 통해

일종의 ‘덮어 지우기’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덮기’ 또는 ‘지우기’는 먹의 농담 표현을 어렵게 하여 먹색을 단색화 시키는

경향성을 만들어 내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림은 생기 없이 밋밋해지기 십상이다.

이러한 화면구성의 변화와 더불어 먹의 다양한 운용보다는 운필(運筆)의 묘를

택함으로써 풍경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관점과 정(情)을 펼치려 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고향의 산, 논밭, 농가,

초목, 하늘이다. 좀더 경(景)에 정(情)을 풍부하게 담아낼 법도 한데,

그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는 왜 고향을 찾아 그곳의 풍경을 그림에 담으려 했을까?

번잡한 도심생활에 지친 그의 심신 앞에 펼쳐진 고향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그는 고향의 풍경에서 충분히 그의 감정을 우의적으로 펼칠 만도 한데, 그 서정성은 약하다.

경물에 대한 운필의 다양한 표현과 경영위치(經營位置)의 묘와 같은 조형에 대한 관심사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번 작업에서는 작가의 말처럼 “전통적인 회화양식으로서의 가치관과 현대적인

조형의식으로의 전환 사이의 갈등”도 보인다. 그것이 도시의 삶과 향촌의 삶과의

갈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전과는 달리 고향산천을 직접 사생한 이유에는 단순한

실경산수에 대한 관심보다는 인간 본연의 향수와 회귀와 같은 심리적 측면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문맥에서 그의 풍경이 심경(心景) 또는 진경(眞景)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져본다.

“이러한 이원적 갈등의 구조는 하나로 종합되는 추세에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이 아울러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는 무엇을 어떻게 개혁하고 있는 것일까?

작가와 관객은 이 의문에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서구적인 기법이나 회화관에 말려들거나 낡은 스타일에 안주해 버리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독특한 회화세계를 확립해 나가”는 것.


작가와 관객 자신은 바로 그 줄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태하게 잠자고 있던 의식이 이 번쩍 눈을 뜰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결코 편안함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가 첨예한 갈등과 의혹에 휩싸여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의 필의(筆意)를 알게 될 것이다.

서구적인 회화관이나 낡은 스타일에 안주하는 비평적 태도 역시 개혁되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하자면, ‘평면성’ 개념이다.

작가는 1회전 때 “평면회화에서 중요시되는 조형의지 즉 자유로운 화면의 구성을 위해서

원근법과 농담을 절제하고 평면성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는데,

다분히 ‘기술적인’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더욱이 전통 동양화론에서 ‘평면성’ 개념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고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평면성’이 왜 강조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평면성’은 서양의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미니멀 회화에 이르러

정립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회화가 회화일 수 있는 조건이 바로 ‘평면성’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반해 동양화는 회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보다는 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존재론보다는 생성론(生成論)에 가깝다.

생성론적 관점에서 동양회화를 총결한 것은 석도(石濤, 17세기)의

일획론(一劃論)이라 할 수 있다.

필묵의 일획: ‘한번 그음’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난다는 석도의 화론은

동양회화의 미니멀한 특징에 대해 설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평면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론적 출발과 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물성(物性)이나 형사(形似)보다 성정(性情)과 신사(神似)를 중요하게 취급했던

동양회화의 미학에서 ‘평면성’이라는 개념은 그 근거를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서구의 회화관이 역으로 동양회화의 현대화나 비평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점을 충분히 재검토해, 자신의 작업 속에서

그 결과를 반영시켜야 할 것이라 본다.

이제 한국화는 어설픈 줄타기나 또는 그 비슷한 흉내로 자족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유재현의 작업을 편안히 즐길 것이 아니라 그 필의를 파고들어

잠자고 있는 동양회화의 자의식(自意識, self-consciousness)을 깨워 흔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명훈 | 스톤앤워터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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