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통 초상화로 부터 추출한 미술적 고유 유산을 '건물', '공간' , '투시'를 소재로 작업하는 이여운 작가는 감성적인 직접적인 표현을 화폭에 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표현들이 딱딱하고, 건조하고, 직선적인 표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여운 작가의 작품 속 소재는 죽어있는 대상물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며 숨 쉬는 건물과 공간으로 변화"시킨다.그래서 화폭에 직접 표현하지 않는 작가 개인의 고유하고 풍성한 감성들은 작품 혹은 작품 제목 속에서 빛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갤로리 도스(Gallery DOS)에서 이여운 작가의 ‘Modern Times’전시회가 오는 2018년 11월 14일(수) 부터 2018년 11월 19일 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갤러리 도스가 특별기획했고, 캔버스천에 수묵으로 그린 '서울시청', '용산역', '한국은행', '광주시청' 등의 최근 작업 작품을 전시한다.
여기 혼돈이나 무질서는 없다. 계보적으로 수묵화의 정신을 잇는 세계이니만큼, 유혹하는 색의 조화나 촉감을 불러내는 질감, 율동감 같은 요인들은 없다. 직선 위주로 재현된 중립적인 건축물들은 마치 정물(靜物)처럼, 대부분의 맥락을 덜어낸 채다. 도시는 정면이거나 종종 과장된 원근법이 적용된 건축물들 외엔 다른 서사를 호출하지 않는다.
혼돈도 무질서도 없는, 이 얀센주의(Jansenism)적 반듯함은 역설적이게도 ‘현대도시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소외시키고 고독하게 만드는가’의 질문에서 시초되었다. 이를테면 현대도시들을 온통 휘감고 있는 자본의 횡포를 자각하고 보고하는 것에서 말이다. 이 여운에게 현대도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동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그 안에서 현대인들은 빛의 결핍에서 오는 희미함, 답답함, 불안, 방황, 표류를 삶의 제대로 된 모습인 줄로 착각한 채 살아간다. 그곳에선 암흑이 세상의 이미지가 실체 노릇을 한다. 무지의 온상인 이 현대적 동굴 안에서도 암흑이 세상의 원형으로 간주되고, 그림자가 사물을 대신하고, 이미지가 실제 노릇을 한다.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거리에 한 인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는 2002년 작품 <고독이 당신을 덮칠 때(When loneliness comes to you)>나 2006년 작 <검은 기운>처럼, 이즈음의 어느 시점까지 이여운의 도시견문록은 꽤나 직설적이고 문학적인 방법으로 개진되었다. 그것들보다 조금 앞서 그려진 <도시 기생식물(A paracite plant in city)>(2001)도 같은 맥락일 것으로, 암운(暗雲)처럼 삽시간 도시를 덮친 그 ‘기생식물’은 아마도 관계의 단절로 인한 소외와 고독일 것이다. 현대인들이야말로 거대한 시스템-도시는 그것의 형태다- 속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면서,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는 일 없이 하루하루 먹고 자는 일만 반복하는 것을 삶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그리고 그 결과 더할 나위 없이 고독해진 최초의 인류일 것이다.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Arnundhati Roy.1961~ )의 말처럼, 고독은 이미 ‘어설픈 다국적민들’의 돌이키기 어려운 천형(天刑)으로 자리 잡았다. 도시를 점령해버린 빌딩들 사이에서 수인처럼 살아가는 인간군상, 그것이 이여운이 밝히고자 했던 진실이었다.
최근 이여운은 건축물 자체에만 몰입한다. 건축물들의 구조와 특징적인 외형을 제외한, 배경과 나머지의 주변부 요인들이 모두 제거된 일련의 미학적 얀센주의라 할 만한 노선을 경작하는 중이다.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일어난 가톨릭교회의 개혁 세력의 일파로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행한 예수회와 대립했다.
건축물들에 담겨있는 역사적, 인류학적 레퍼런스 같은 인문주의적 요인들조차 여기서는 큰 의미가 없다. 금산사 미륵전이건 뉴욕의 건축물이건, 유서 깊은 노트르담 성당이건 작가의 거주지 근처에 있는 평상가옥이건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여운의 건축물들은 왕궁이거나 성당이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건축사적인 조명이나 유명관광지의 소비주의의 이름으로 불려나온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이런저런 기념비성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들 자체의 미적 특성 때문에 그곳에 불려나온 것들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 모두가 일체의 변주가 억제된, 정제된 직선들로만 된 조형성과 구조의 탐구라는 동일한 목적을 향해 도열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 흐트러짐 없는 엄격함의 태도가 철저하게 신앙의 내적 순수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순결함에 대한 얀센주의적 동경을 환기하게 하는 대목이다. 포르트 로얄의 얀센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추구하는 예수회와 달리, 일체의 사회참여나 세속적 현실주의, 그리고 영웅주의와 거리를 취하면서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로의 회복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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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들은 인간에게 횡포를 일삼는 도시의 서사들, 권력과 자본의 만연한 궐기, 부동산 열풍 등의 서사와는 사뭇 무관하다. 그러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의 삭제와 관련된, 또는 ‘맥락의 소거’라 할 수 있을 일련의 얀센주의적 정화를 거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화를 위해 배제된 것이 단지 역사적이거나 사회정치적인 맥락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들과 연류되었던 작가의 입장이나 주장도 현저하게 추슬러져야 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그것들은 이제 더는 천문학적인 시가(時價)나 그 소유주가 타고난 행운을 환기시키는 경제사회학적 보고서가 아니다. 예컨대 고작 세입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 외에 달리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의 우울한 서사를 곱씹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미적 쾌의 대상으로서 분류될 수 있다. 이제 그것들에 어떤 금융회사들의 촉수가 뻗어있는가를 알기 위해 건물등기부를 들춰보지 않아도 되는 건축물들이다. 작가는 자신의 건축물들을 자본의 단위로 해체시키는 이데올로기적 보고나 고발로부터 분리시키고, 다만 탈맥락화 또는 ‘미학적 감산’이라 할 수 있을 과정을 통해 그것들에 무겁게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에 의해 가려졌던 본연의 조형적 미(美)에 다가서고자 한다. 탈맥락화이되, ‘해체를 위한 탈맥락화’가 아니라 ‘정화를 위한 탈맥락화’의 미학인 셈이다.
이여운의 미학적 감산 또는 맥락의 소거가 주변부를 정화하면서 건축물들의 고유한 조형성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온다. 오롯이 그것들 자체의 조형적 특질을 음미하도록 하는 그것은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잡종성과 이합집산의 미학이 창궐하는 시대에는 매우 희소해진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여운의 회화는 흔히들 이해하는 ‘도시풍경화’가 아니다. 풍경화의 미학을 구성하는 요인들, 이른바 ‘풍경이 될 만한’ 요인들인 분위기나 대기, 배경 등은 오히려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여운의 건축물은 그것을 한 폭의 멋진 풍경화로 만드는 요인들과 결별한 채, 오로지 그 자체의 존재성에 충실한 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다른 종류의 미(美)를 지향한다. 이것은 미적 노선으로서 매우 의미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피에르 쌍소(Poerre Sansot)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자면, “당신은 당신이 되고, 나는 내가 되는 그것‘이 바로 미(美)의 정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