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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반연극 비연극

권종민 기자 | 기사입력 2003/10/01 [11:30]

연극 반연극 비연극

권종민 기자 | 입력 : 2003/10/01 [11:30]

▲ 연극 반연극 비연극 : 날것의 연극에서 철학하는 연극으로  © 문화예술의전당


연극 반연극 비연극 : 날것의 연극에서 철학하는 연극으로


안치운 | 솔 | 2002년 03월

\28,000
   

413(페이지)

ISBN : 8981334978


[ 책소개 ]

오늘날의 한국 연극판 전체의 한계를 진단하고, 연극 연출가와 작가를 분석하면서

한국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과 또다른 실마리를 제시한다.

양적 증가에 비해 나아지지 않는 질적 수준을 꼬집고 유행만을 쫓는 획일화된 연극,

판을 치는 날것의 연극을 비판하면서 한국 연극의 질서와 원리,

그 이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론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연극 작가들이 이론을 통해서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말과 행위,

이론과 실제를 공부하여 철학하는 연극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 저자 및 역자 소개 ]
  
저자 : 안치운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연극학과를 나와 파리 제3대학(뉴벨 소르본 대학) 연극연구원에서 연극교육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 연극평론가로 활동한다.


『연극 교육 제도론』『추송웅 연구』『연극 감상법』『공연 예술과 실제 비평』

『연극 제도와 연극 읽기』『한국 연극의 지형학』『옛길』등을 썼고

공저로는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연출가들』

『다섯에서 느낌으로 -이강백 희곡연구』등이 있다.

『미셸 비나베르의 한국 사람들 : 희곡과 공연』

『연극 인류학 종이로 만든 배』를 옮겼다.

지금 호서대학교 디지털 문화학부 교수로 있다.


[ 목차 ]

머리말

1. 연극, 몸, 자연

연극의 생성, 텍스트의 분리ㅣ글에서 이미지로

연극의 새로운 표현 기제ㅣ빛ㆍ소리ㆍ오브제

극단의 정신사

우리 시대의 시민 연극론

연극의 미래와 비평의 눈ㅣ연극ㆍ반연극ㆍ비연극

연극 비평과 철학

질문을 잃어버린 한국 연극

문예 지원과 창작의 태도

몸의 어원학

연극과 춤ㅣ배우ㆍ몸ㆍ표현

벗은 몸의 진실ㅣ마임과 공연에 관한 노트

연극과 자연ㅣ풍경에 매혹된 영혼


2. 작가와 작품의 숲

우리 근대극의 성찰과 반성ㅣ서항석론

모란보다 더 고운 산불ㅣ차범석론

자유로움과 경쾌함의 질서ㅣ김정옥론

풍자에서 전복으로ㅣ이근삼론

연극과 삶의 정열ㅣ이원경과의 만남

연극성과 희곡의 허무주의ㅣ이강백론-「뼈와 살」「느낌, 극락 같은」을 중심으로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었다ㅣ김민기론

눈을 뜨고, 눈을 감고ㅣ채승훈론

연극과 계급의 통합ㅣ장 빌라르론



[ 책속으로 ]

유명의 시대, 유명의 연극

무명의 시대, 무명의 연극에 이어 연극이라는 이름이 생겨나는 시대가 이어졌다.

연극이라고 할 수 있는 기존의 것과 함께, 그것을 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과 함께.

유명의 시대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서 사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간 중심적 사유체계를 수립하고 이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세계를 조직하고 키워왔다.


그리하여 이성적 인간만의, 이성적 인간만에 의한, 이성적 인간만을 위한

자연 지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유명의 시대, 유명이 연극을 가능하게 한 것은 조명 때문일 것이다.


조명은 자연의 파괴를 상징하는, 아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유명의 시대가 내세우는

과학 기술의 산물이다.

그것이 연극으로 들어오면서 연극을 밤낮없이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장소와 때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다.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되고, 이곳이 금세 저곳이 되고,

저곳이 금세 이곳이 되는 조명의 마술 앞에서 연극은 확대되었지만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공 조명으로 인하여 하늘아래 어둠을 밝히는 달빛과 계절을 잃어버렸다.

관객과 배우들은 무대 뒤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망각하게 되었다.

곧 바람을 피할 수 있었지만 몸은 오히려 얼어붙었다.


조명으로 연극은 관객들에게 가릴 것과 보여줄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은 환하게 비춰주지만

숨기고 싶은 것은 조명을 낮추거나 꺼버려 컴컴하게 가려버린다.

연출 일 가운데 하나가 조명을 조정해서 관객들에게 보여줄 것을 선별하는 것이다.


조명에 앞서, 연극을 하는 이들이 무대에서 하는 모든 것은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조명의 활용은 무엇보다도 보여주고 싶은 것 가운데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기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것 가운데 들어 있는 보여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감추는 기능을 발휘한다.


유명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기도하지만 사물과 사물의 경계를 구분하는

배타적인 일이기도 했다. 이렇듯 유명은 망각을 낳고 그것은 교육에 의해서 다시 굳어진다.


메이어홀드처럼 “교육적 허구”를 내세워 연극 학교를 부정하는 이들의 입장은

학교가 오히려 자연의지배와 더불어 연극의 면모를 제거해버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학교와 선생이 반성하는 것은 학생들의 그것보다 훨씬 어렵고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배우가 뒤를 잇는다.

배우는 배排와 우優가 합쳐진 글자다.

배는 비극을연기하는 이를, 우는 희극을 연기하는 이를 뜻한다.

배排는 아닐 비非와 사람人이 합쳐진 글자다.

비는 설해 문자에 따르면 날아가는 새의 두 날개의 모습에서 따온 상형자다.

그래서 죄罪라는 글자도 새를 잡아두는 새장을 뜻한다.

새의 날개 모양이 나쁨을 뜻하는 대표적인 말이 된 이유는 새의 양 날개가 서로를 반목하고

어긋난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하고서는 날아갈 수 없는 것이 날개의 속성이다.

고대인들은 이 어긋남, 반목의 속성을 최악이 것으로 보았다.

비극의 비悲는 어긋남非을 보는 마음心이다.

비극은 어긋남과 반목을 합친 연극이며, 배우는 어긋남과 반목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유명의 연극은 이때부터 커지기 시작했다.

작품에 이름이 붙고, 작품의 성격에 따라 작품이 놓일 자리가 구별되었다.

--- pp.97~99


장님이 되어버린 토끼

인류의 연극사는 연극이야말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그것은 몸으로 하는 연극이야말로 생명을 위하여 환경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설정해야 할 의무를 지녔기 때문일 터다.

여기에 문화의 주된 상징인 언어가 덧보태지는데,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규정되고 사회적 산물인 몸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연극은 삶의 근원보다는 덩치 큰 이익을 추구한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빠져 다른 생명체, 생태계의 권리를 무시한다.

극장은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초라하고, 무대는 조악하고,

공연의 내용들은 새로운 것이 많지 않다.

연극도 변함 없고, 연극하는 이들도 다르지 않고,

연극 동네의 풍경도 늘 그렇고 그렇다.


기이한 것은 연극할 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공연은 그런 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원금이나 후원금을 받을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일까?

'연극'이 아니라 동숭동을 비롯한 한국 연극의 서식지가 참으로 기이하다.


오늘날 공연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빠른 속도로 노래하고 춤추는,

승자독식을 경영 원칙으로 삼는 뮤지컬이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생태계와 분리시켜 고립과 긴장의 체계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런 연극들은 신경증적 강박을 관객들에게 호소한다.

예컨대 거의 모든 작품들은 인간의 억압과 정신적 소외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하면서

상투적으로 억압과 소외를 갉아먹고 있다.

“신비한 암호가 고스란히 오므린채 기다리고 있는”(휘트먼,「풀잎」) 자연과 생태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려는 작품은 많지 않다.


연극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까?

인간은 지구의 거주자가 아니라 방문자라는 입장을 지니도록 할 수는 없을까?

인간이 있는 곳에 연극이 있다면, 연극은 인간과 삶,

그 터전인 땅과 환경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예술에 위계가 있다면 몸으로 하는 연극이야말로 생명을 위하여 환경을 가장 중심적인 것으로

설정해야 할 의무를 크게 지녔을 것이다.

인류의 연극사는 연극을 삶과 만나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이라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국 연극은 연극에 대한 기표와 기의가 따로 논다.

연극에 대한 욕망은 커지지만 연극을 만드는 이들의 삶의 물질적 근거는 변함이 없다.


연극에 대한 언어가 연극하는 이들의 의식만 팽창시키고 확대시켰을 뿐이다.

그 끝은 분명한 자기 소멸이다.


언어가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올 때 기표가 완전히 기의와 결별하는 것처럼,

연극과 연극하는 이들의 실제적 삶 사이에는 근본적인 균열이 생긴다.

떠올리기 싫지만 그 끝은 무섭다.

공연된 연극들은 무너진 기표가 되고, 연극하는 이들은 맹목적으로 연극을 일삼는

자동 기계 장치로 전락하는 것이 아닐까.

공부하고 싶었던 젊은이들이 뜯어먹혀 황폐화되어간 이 동네는 언제가지 지속될 것인가?

한국 연극도 연극에 관한 생태 윤리를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극을 보전하고 연극인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연극과 삶과 환경에 대한 윤리가 시급하다.


비유로 토끼 이야기부터 하자.

남미에서는 오존 구멍을 통화한 강한 자외선에 노출된 탓으로 장님이 되어버린 토기들이

수백 마리씩 들판을 해매고 있다고 한다.

두드러지는 피해자는 사람이 아닌 토끼들이므로,

사람들은 이 사실을 거의 땅에 묻어두거나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세계에서 공기 오염이 가장 심각한 곳은 한국ㆍ멕시코ㆍ중국이라는

세계보건기구의 보고를 기억하자. 이들 세 나라의 오염은 단순히 자국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넘어 지구촌 모두를 위협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백화점들의 세일 기간에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길과 뒷길들이 모두 복잡해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줄곧 있어온 일로, 모두들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모여드어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일이 삶의 즐거움이라는 태도는 장님이 된 토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백화점에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집과 극장은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이 삶이 거주하는 집이라면, 극장은 연극이 거주하는 집이다.

하여 작가와 작품들은 세상과 극장을 동일시하고,

삶과 연극을 서로 견주어 비유하곤 했다.


장님이 된 토끼 이야기는 분명 우리 삶의 위기를 말해준다.

문제는 그것을 위기라고 여기지 않는 태도다.

이러한 생태계의 위기는 예술의 위기, 생명의 위기와 직결된다.

논란 대상이 되었던, 고속철이 옛 도시인 경주의 중심을 관통할 것인가,

우회할 것인가, 땅속으로 다니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 역시 문화재를 보호하고

건설에 따른 자연과 생명의 피해를 줄이고자 함일 터다.

--- pp.208~211


[ 출판사 리뷰 ]

1. 한국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영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자극적이고 과다 포장된 가공물에 비해 연극이 설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예전에 비해 공연 수는 늘어났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자생할 수 없어 지원 제도가 뒤를 받쳐주지만 여전히 한국 연극의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2. 공연평이 아닌 연극판 전체를 반성하다

과거에 나온 비평서들이 주로 공연 하나하나를 평한 것에 그쳤다면

『연극 반연극 비연극』은 한국 연극판 전체에 대해 반성하고 비평하였다.

한국 연극에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을 가늠하는 큰 조건은 소비의 양에 달려 있다.

흥행만 되면 같은 작품이 계속 복제되어 만들어진다.

연극이 양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예 지원 제도 덕분이다.

공연 수가 늘어나면서 연극 작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많은 극단이 생겨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질적 수준은 양적 증가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공연은 많은데 볼 만한 공연과 기록 평가할 작품의 수는 적다는 얘기다.


연극을 만드는 이들은 연극을 올리기 전 치열한 고민을 덜 하게 되고,

공연 결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창작자들은 덜 우울해하고,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욕구는 점점 줄어들었다.

창작자들에게 질문이 없다는 것은 우려할 일이다.


창작자가 열정을 가지기보다 유행을 좇게 되면서 획일화된 연극이 병적으로 판을 친다.

결국 공연을 통해 작가를 찾고, 작가가 만든 세계를 함께하는 문화적 절차들이 거의 생략되고 만다.



현실이 썩었다고 하면서 아무 말이나 하고 네가 틀렸다고 말의 논리적 방법 대신 발길질하는 연극들,

존재만 있고 부재는 없는 날것의 상징들이 난무하는 강요의 연극들이다.

이런 연극들은 관객에게 추론하는 쾌감을 주지 못한다.

관객이 자발적인 주체가 될 수 없게 만든다.

설득하는 노력이 배제된 연극은 강제하는 연극을 낳을 뿐이다.

관객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자장, 내 영향력 아래 놓으려고만 하는 행위인 폭력은

날것의 소산이다. 현실에 대한 고민 없이 성찰이 빠지고 앞만 보고 가는

날것의 연극이 판을 친다.


3. 극단은 곧 연극 정신이다

극단이란 단순히 연극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극단이란 공동체 정신, 몸과 자연이라는 생명의 정신, 연극 작가라는

탁월한 사유의 정신을 담아낸다.

극단은 쉴새없이 움직여야 한다.

극단이 안정이란 제도화를 거부하면서 얻는 덕목은 자유, 욕망, 인간성이다.

극단이 없어져도 극단 정신은 옮겨가고 새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극단들은 걷지 않고, 멈춰 있다.

동숭동에 머무는 극단은 동숭동이란 장소의 아우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새롭게 나타나는 극단 정신을 기대하기 어렵고 연극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4. 연극 비평을 비평하다

우리나라 연극에는 예술 작품으로서 연극과 연극 예술가를 승인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승인이 없다는 것은 작가와 작품이 존재할 수 있는 권리가 없어도

연극의 장에 들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


연극 작가와 작품에 대한 승인은 바로 연극 비평이 큰 몫을 맡는다.

연극 비평이 이론과 글을 지녀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연극 비평은 제소리를 내지 못한다.

오늘날 연극 비평은 자족적이다.

철학적 입장이 담겨 있지 않다.

연극 철학으로서 비평이 담론이 되지 못하는 것은 장르의 해체, 연극 동네의 위축,


좋은 공연의 부재 탓만은 아니다.

연극 비평가의 게으름과 오만 때문이기도 하다.


연극 비평이 연극에 대한 아무런 소명도 없고 연극 동네의 주문도 없으며,

아무도 연극 비평을 믿어주지도 않는 지금 역설적으로 연극 비평에서 철학의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연극 이론이 필요하다.

이론과 실제를 분배하는 교수법은 매우 위험하다.

이론은 실제를, 실제는 이론을 철학해야 한다.

연극 이론과 실제의 결별은 연극의 불균형을 낳고,

연극 바깥에서는 연극의 몰이해를 자초하게 된다.

연극 작가들은 이론을 통하여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말과 행위,

이론과 실제를 공부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론과 실제의 틈새를 메워줄 거멀못 역할을 하는 것이 곧 공연이다.


우리나라 연극의 질서와 원리, 이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론이 있어야만

연극하는 이들은 철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이 바깥에서 인정받기위해서는 연극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사유가 공유되어야 한다.

결국 새로운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연극의 미래를 위하여 비평이 주목해야 할 것은

연극이란 매체의 변화, 매체로서의 말, 매체로서의 몸, 새로운 매체로 가능한

다른 연극적 표현 등이다.


또한 연극의 언어, 비평의 언어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이로써 비평가는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비평 철학의 최대값이다.


5. 연극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다

몸은 배우와 관객을 막론하고, 사회속에서 생출되고 길들여지고 교육되고 코드화된 언어다.

새로운 매체란 몸을 대체시키면서 편리함을 내세우는 반면 몸을 소외시킨다.

마임은 몸 이외에 어떠한 매체로도 대체될 수 없는 장르

그러니까 매체를 생산하고 결정하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마임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

장르의 원형 보존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연극 자체로 돌아가기 위해 몸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몸을 떠난 연극과 춤은 상상할 수 없다.


연극은 이제 삶과 자연 환경을 전제로 한 미래의 전망을 지녀야 한다.

문제는 연극의 생태 윤리적인 역할과 올바른 이해에 있다.

연극이 자연과 같은 그리움과 원시림의 터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연극 본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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