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뮤지컬 <새우잡이>의 연출가 전세권은 작곡가 오경일과 개인적인 친분으로 뮤지컬 <새우잡이> 작곡을 의뢰한다. 무대가 삼류인생들의 주 무대인 선창이라는 점과 등장인물들이 뱃사람과 작부들이라는 분위기에 맞추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전세권은 한국적인 뮤지컬을 위해 음악도 민요조나 타령조를 가미하여 작곡하기를 청하였다. 뮤지컬에서 오케스트라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전세권은 열악한 제작비를 염두에 두고 지휘자 박은성 에게 부탁하여 젊은 음악인들로 구성된 ‘영.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았다.
그러나 앞서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대로 공연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는, 막상 공연의 막을 올리는 날 공연이 올라가기 전 관객이 3명에 불과하자 연주자들이 출연료에 불안을 느끼고 공연에 불참하고 악기를 챙겨 공연장을 떠나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공연에의 진행은 불가피하기에 전세권은 연습 때 반주를 맡았던 경희대 음대 재학생의 피아노 반주만으로 공연을 올리게 된다.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 <새우잡이>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까스로 막을 올릴 수 있었다.
1965년 8월 국립극장에서의 초연 공연은 이렇게 단 4명의 관객과 함께 시작하여, 다음날은 피아노 반주 없이 테이프 MR로 진행되어져 150명의 관객이 들어와 총 관극인원은 연출 포함하여 155명이라는 기록 아닌 참사의 기록을 갖게 된다.
훗날 공연전문계간지 ‘극작에서 공연까지’에 기고한 글에서 전세권은 그 당시 참담했던 심정을 이렇게 토해낸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새우잡이)은 피아노 반주로 막을 올렸다. 객석엔 막 올리기 전 한 사람이 더 들어와 4명의 관객과 나, 이렇게 5명의 관객 앞에 30여 명의 출연진이 젊음의 열기를 뿜으며 한국 최초의 뮤지컬은 시작되었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리고 다짐했다. 오늘의 이 5명의 관객은 훗날 만원사례의 관객을 만드는 견인차가 되게 하리라! 둘째날 150명의 관객이 들어와 155명의 관객으로 첫 번째 뮤지컬은 ‘무식칼’로 끝이 났다” - 공연에서 극작까지, P75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전세권 -
한국 뮤지컬사 연보는 이렇게 정리되야 한다.
1965년 8월 26일, 27일 국립극장 (현재 명동예술극장)에서 한국 최초의 뮤지컬 <새우잡이>가 전세권 작.연출로 공연되었다.
1966년 7월 22일 ~ 7월 26일(5일 간) 매일 3시 30분 , 7시 2회 공연 , 후원 제3화학(현재 한독약품), 주최 주간한국, 황유철 작, 안길웅 작곡, 이운철 안무, 전세권 연출, 김홍종.김호근 조연출, 봉봉사중창단, 쏠리스트로 엄정행(당시 경희음대2년 재학)이 특별출연했고, 출연진은 미국에서 뮤지컬 워크숍을 거친 김석강, 이로미, 그리고 국내의 뮤지컬 탤런트 김기일, 이성웅,장욱제,이신재,이완호,박웅,장미자,이주실,원미원,윤여정 등 30여 명의 연기자가 출연했다.
극중 황유철 작,안길웅 작곡, 한상일이 노래 부른 '애모의 노래'는 장안의 화제였다.
이 공연의 제목은 뮤지컬 <카니발 수첩>이다.
그리고 뮤지컬 <카니발 수첩>의 성공적인 공연이후 3개월 지나서 예그린 악단의 ‘살짜기 옵서에’가 공연되는 것이다.
1966년 10월 26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살짜기 옵서예>가 막을 올려 29일까지 4일 간 공연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뮤지컬 최초의 연대기는 수정되어 다시 바르게 써 져야 하는 것이다.(최초의 한국 창작 뮤지컬이 예그린의 '살짜기 옵서에'로 잘못 알려져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기막힌 실정이다)
그런 그가 1980년 11월 언론 통폐합으로 직장을 잃은 어려운 시절에 아내를 따라 성당에 가 교리공부를 하며 ‘황사영이라는 순교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되었고 이후 베론에서 바티칸까지 10년 간 발로 뛰며 취재하여 르포르타주 장편소설 ’피의 증거‘라는 제목으로 1993년 첫 출간하였다가, 희곡 황사영 백서를 중심으로 드라마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를 썼다. 이후 동방미디어 허성윤 사장이 재출판할 것을 요청하여 수정 보완하여 ’황사영 묵시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고 적고 있는 책이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합격했을 때 임금 정조로부터 어무(손을 어루만지며 격려함)을 받았건만 마제 정약용 가를 찾아갔다가 그의 형 정약종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정씨가의 맏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 마리아를 만나 결혼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한성에 입성했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에게서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베론 골짜기에 숨어들어가 자지에게 영세를 주었던 주문모 신부가 참수 당해 군문효수형을 받았다는 비보에 천주학을 버리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순교자들의 약전과 이 땅에 박해를 종식 시킬 방안을 써서 북경에 와 있는 로마교황청 주교에게 보내려 하다 그것이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고 저자인 전세권은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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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목차와 내용은 사진으로 대신한다.
책 뒷 부분에는 희곡인 '황사용 백서'와 , ‘순교자 황 알렉시오’ 라는 제목의 전 2막 45장으로 구성 된 드라마도 수록되어 있어, 소설과 희곡,드라마의 깊이 있는 차이로 공연을 통해 관객을 배려하듯 독자들을 배려하고 있는 그의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