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 평창에서 다시 민나다-차강 박기정·무위당 장일순’ 전 9월 26일까지 개최시대 정신과 예술혼의 공존
‘緣, 평창에서 다시 만나다-차강 박기정·무위당 장일순’ 전은 평창군문화예술재단이 주최한 전시다.
평창군 뵹평콧등작은 미술관의 기획전으로 강원도를 대표하는 서화가 스승 차강 박기정과 제자 무위당 장일순의 깊은 인연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평창에서 다시 만나는 전시가 개최된다. 차강과 무위당의 작품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사의 시대 정신과 예술혼을 재조명하는 전시다.
전시는 암울한 시대에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평생을 꼿꼿하게 선비 정신으로 살아낸 독립운동가 차강 박기정의 올곧은 성품과 기개가 다긴 서화 작품과 혼탁한 사회 현실에서 생명과 협동운동에 매진한 무위당 장일순의 철학을 담은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군자중 가장 어렵다는 ‘난’은 60년을 그려야 완성된다고 한다. 특히 일체의 욕심과 흔들림 없는 정신의 집중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삼전지묘(三轉之妙) 화법은 추사 김정희에서 시작해 대원군을 거쳐 박기정으로 이어졌다. 박기정을 사사한 장일순은 사람 얼굴을 닮은 독특한 의인난(擬人蘭))을 완성했고, 영동 제일의 서화가로 인정받는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 한 쪽은 6점의 대나무 그림으로 채워졌고, 다른 한 면은 박기정의 글씨 4폭으로 구성된 1910년대 초기 차강 박기정의 6폭 병품이 최초로 선보인다.
◇전시 개요
-시대 정신과 예술혼의 공존
‘緣, 평창에서 다시 만나다-차강 박기정·무위당 장일순’ 전은 봉평콧등작은미술관의 기획전으로 차강 박기정과 무위당 장일순의 작품 20여 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박기정과 장일순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와 혼탁했던 근현대사를 치열한 시대 정신을 지키며 살아낸 분들이다. 암울했던 세태 속에서 절개를 지킨 선비 한분과 그 선비를 스승으로 모시고 풀 한포기의 생명도 소중히 여기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일생동안 실천적 의지를 드높인 사회운동가 한분의 소중한 인연을 확인하는 특별전으로 마련됐다.
근현대사의 서화가 중 영동 제일의 서화가로 꼽히는 무위당의 작품 14점과 일제 강점기 은둔의 묵객으로 알려진 차강 박기정의 우국 정신이 새롭게 조명 받으며 강원인의 표상으로 인정받는 박기정의 작품 6점이 소개된다.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로 이름을 날린 박기정(朴基正)과 그의 정신과 예술의 맥을 이은 제자 무장일순(張壹淳)의 인연을 담아내는 전시 공간이 차강 선생이 태어난 생가 근처에 자리한 봉평콧등작은미술관이라는 것 또한 뜻깊은 일이다.
당대 최고의 문재로 이름을 드높인 차강 선생은 강릉의 선교장에 오랫동안 기거하며 글과 그림을 남겼다. 그가 남긴 많은 작품이 선교장을 설명하고 기록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차강 선생의 작품 중 수석지관(壽石池館) 역시 강릉 선교장이 있는 경포호 주변의 명소인 활래정(活來停)을 설명하는 작품이다.
예서와 초서에 능했지만, 꼿꼿하고 엄격한 성품의 차강은 선비들의 고고함과 절개의 상징인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차강의 선비 정신과 예술혼은 ‘가을의 물처럼 차고 맑은 정신을 지니라는 가르침인 추수정신(秋水精解)’을 근간으로 한다.
전시에서 만나는 차강의 기개와 정신이 담긴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지만 특별한 것은 최초로 공개되는 병풍 한 점이다. 전면에 6점의 대나무 수묵화와 후면에 4점의 칠언절귀로 된 당송시대 한시를 수록한 6폭 병풍이다. 제작 연대는 대략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차강 선생의 굴곡진 삶을 보는 것 같은 이 병풍은 소리 없이 사라질 뻔했던 작품이다. 군데군데 상처가 있고 헤어진 병품은 상지대영서대학교 한상철 교수와 특별한 인연으로 형체가 보존돼 강원의 소중한 유물로 남게 됐다. 그리고 이번 전시를 통해 세상에 처음 모습을 선보인다.
무위당 장일순도 스승 차강 박기정의 지조와 절개를 이어받아 생명을 존중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우국 지사로 살아내며 귀감을 보였다. 차강과 무위당의 공통점은 두 분 모두 야인으로 일생을 마감한 점이다. 무위당은 교육가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신의 역할을 끊임없이 재규정했다. 그 밑바탕에는 ‘다른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교육가와 사회운동가로서의 기질이 있었다.
무위당 선생의 삶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대한민국에서 협동조합의 기초를 만드는 등 수많은 민초들의 삶을 개선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왔지만 성과는 자신이 가져가는 법이 없었고, 늘 뒤에 서 있었으며 나서기를 꺼린 영원한 야인이었다.
◇작가 소개
1.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 -일생일도 일생일념의 선비 정신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진 혼란기에 기개 넘치는 선비 정신으로 일생을 일관했던 차강 박기정(此江 朴基正 1874~1949)은 당대에 이름을 높인 서화가이며 독립운동가였다. 일평생 출사하지 않았던 차강의 절개는 오늘 그 빛을 더하고 있다.
차강 박기정은 강원도 강릉과 원주 일대에서 서화로 명성을 떨친 분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일원(一元), 호는 차강(此江) 강재(江齋) 강옹(江翁) 등을 사용했다. 당대 영의정을 지낸 세도가 권돈인의 문하에서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에게 사사(師事)한 차강은 서예와 그림에 모두 능했고, 6세 때 이미 신동으로 소문난 인재였다.
그러나 차강이 후일 서화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타고난 재주와 함께 굳은 의지와 각고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당에 다니던 어린 시절 차강은 사랑방 벽에 일일오백자(一日五白字)를 붙여놓고 서당에서 돌아와 매일 500자를 쓰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을 정도로 서화 공부에 열심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타고난 재주와 이런 노력으로 12세 때 이미 명필로 이름을 높이고, 18세 때는 강릉 낙산사에서 개최된 전국 한시백일장 휘호경시대회에서 장원을 하며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동대문 밖에서 박기정을 따를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행서를 잘 썼고, 예서와 초서에도 능했다. 그러나 글씨보다는 그림을 많이 그려 사군자 가운데서도 난(蘭) 그림은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도 그의 난 그림을 보고 “죽(竹)은 내가 낫고 난은 그대가 낫네”라고 평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의 문사이자 지사였던 차강 박기정은 원주와 강릉을 배경으로 많은 서화 작품을 남겼으나,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잊혀진 채 그저 강릉의 묵객으로만 알려졌다. 재예가 뛰어났지만 일제 주도의 서화협회 등록을 끝까지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활동한 차강을 서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조차도 차강의 이름자를 모를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과 강원도에서 평생을 머무른 지역적인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박기정은 구한말 한일합방이 되자 이 강산을 버릴 수 없다고 해 차강(此江)이라는 호를 사용했고,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는 유인석(柳麟錫)과 함께 영월·평창·정선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유인석이 평창의 대화(大和)·봉평(蓬坪)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할 때 앞장섰던 차강은 일제강점기에는 김구(金九)·이승만(李承晩)·여운형(呂運亨) 등 독립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일생동안 출사하지 않은 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은둔했던 차강은 서화에 모두 그 재예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서(書)에 있어서는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비롯해 예서(隸書) 등 각 서체에 두루 능했고, 화(畵)에 있어서는 사군자[四君子)를 비롯해 괴석(怪石)에 이르기까지 문인화의 높은 경지에 이른 근대 강원도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서화가라 평해지고 있다.
차강의 필적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강원도지’, ‘강릉조’에는 서화 잘해 세상 사람들이 명가라 칭한 유일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특히 난을 치는 필선에 넘치는 기세 속에는 추사 김정희와 석파 흥선 대원군의 ‘삼전지묘(三轉之妙)’의 기상이 그대로 스며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예서와 초서에 능했던 박기정의 작품은 글씨보다 그림이 훨씬 많다. 그림 중에는 사군자(四君子)가 많다. 그의 작품에 산수화가 거의 없고, 사군자 등 문인화가 많은 것은 그의 꼿꼿하고 엄격한 기질 때문이다. 선비들의 고고함과 절개의 상징인 사군자가 선비 기질의 차강의 성품에 맞았기 때문이다. 특히 차강의 난 그림은 추사 김정희에서 시작돼 대원군에 이르는 ‘삼전지묘(三轉之妙, 난 잎이 세 번 자연스럽게 휘어져 돌아가는 모습을 붓으로 묘사하는 기법)’를 이어받아 꽃을 피웠다.
차강은 원주와 강릉 지역에 기거하며 작품을 남겼는데,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과는 두터운 인연을 가지고 있다. 선교장은 효령대군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 1748년 터를 잡은 이래 금강산과 설악산, 영랑호, 경포대 등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전국의 명류들이 모이는 문화 공간이었다.
이런 영향으로 선교장의 열화당(悅話堂)과 활래정(活來亭)은 이곳을 거쳐 간 많은 묵객과 화가들의 자취가 다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선교장 주인이던 이근우(李根宇)와 그의 아들 이돈의의 적극적 후원으로 선교장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차강의 작품 중에는 선교장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들이 다수 있다.
일생일도(一生一道) 일생일념(一生一念)의 정신으로 평생을 갈고 닦은 박기정의 서화 세계는 사심이 없는 경지에서 붓을 잡아야 한다는 ‘용필재심(用筆在心)’, 심정측필정(心正則筆正)’과 초월의 자유를 추구하는 ‘추수정신(秋水精神)’에 근거하고 있다. 차강의 선비 정신과 예술혼은 ‘가을의 물처럼 차고 맑은 정신을 지니라’는 가르침인 ‘추수정신(秋水精神)’으로 집약된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국가의 비운과 오롯이 일생을 함께 한 차강 박기정은 평생 강릉 선교장과 평창의 주거지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시와 술과 서화로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차강 박기정은 생전에 두 명의 제자를 뒀다.
손자인 화강(化江) 박영기와 청강(靑江) 장일순이다. 차강 박기정의 서화에 대한 철학 ‘용필재심(用筆在心), 심정측필정 (心正則筆正)’과 ‘추수정신(秋水精神)’은 장일순과 박영기에게 전수돼 현대화단까지 그의 화맥이 계승됐다. 이들 세 사람을 일러 삼강(三江)이라 하는데 손자인 화강 박영기(化江 朴永麒, 1922~)는 난의 최고 화법으로 꼽히는 삼전지묘(三轉之妙)를 계승한 화가로 유명하고 서화가이자 민주화운동가·사상가였던 청강 장일순(靑江 張壹淳, 1928~1994)은 지금까지도 영동(嶺東) 제일의 화가로 불린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살면서 학문의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시주(詩酒)와 서화(書畵)로 울분을 달래며 일생을 보낸 차강은 해방 후에도 혼란한 시대에 뜻을 펼 겨를 없이 1949년에 세상을 떠나 봉평에 묻혔다.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진 고난의 시대를 올곧은 기개로 일관했던 박기정의 정신적 가치관은 그가 남긴 작품 속에 결집돼 있고, 차강이 남긴 수준 높은 서화 작품은 그의 학문적 깊이와 인품과 지조를 후세에 교훈으로 전해주고 있다.
2. 무위당 장일순(无爲堂 張壹淳) -나눔과 생명 운동의 실천가
한국의 서화가이며 사회운동가. 1970년대 반독재투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고 1980년대에는 생명사상 운동을 펼쳤다. 무위당 장일순은 서예에 뛰어났고 만년에 난에 사람의 얼굴을 담은 ‘얼굴 난초’ 작업으로 독특한 화풍을 완성했다.
생명과 협동운동으로 일생을 채운 무위당 장일순은 1928년 원주의 넉넉한 재산가(財産家)에서 태어나 1994년 세상을 타계할 때까지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찾아내어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문인이자 사회운동가다.
청강(靑江)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등의 호를 주로 사용한 장일순은 일찍부터 조부에게 한문을 배우며 총명함을 보였고,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 그림과 서예를 배웠다. 명석한 장일순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던 박기정은 청강이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었다고 한다.
조부와 차강 박기정의 가르침은 글과 그림뿐 아니라 어떤 생명도 인간보다 못하지 않으며, 미물로부터도 배울 것이 있다는 생명 존중 사상이었다. 일생을 ‘생명’과 ‘협동’을 강조하며 애정을 쏟아 부은 무위당의 동력은 조부 여운(旅雲) 장경호(張慶浩)와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 이어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사상을 만나며 열매를 맺는다.
재산가이지만 검소하고 주변을 잘 챙기던 후덕한 조부의 가르침. 조부의 묵객으로 그의 집에 머물던 차강 박기정의 굽힘 없는 선비 기질과 예술혼, 그리고 세상 만물이 다 소중한 한울님이라는 큰 가르침을 준 해월 최시형의 사상은 무위당 장일순이 일생을 품고 산 신념이며 화두였다. 여기에 인생을 함께 한 큰 벗 지학순(池學淳) 주교와의 만남도 한 축을 담당한다. 생명과 협동에 대한 그의 실천적 의지는 지학순을 만나 ‘협동조합’으로 구체화된다.
생애 대부분을 원주에서 보낸 장일순은 원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상경해 배재중학교를 거쳐 현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대학에 입학하지만, 미군정이 제안한 ‘국립대학 설립안’을 반대해 제적당하고 원주로 돌아온다. 이때 접한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사상은 이후 그의 전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4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재입학하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원주로 돌아와 1953년 원주 대성학원 설립에 참여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교육운동에 힘쓰던 중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960년 4·19혁명 직후 사회대중당 후보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정치가 바뀌어야 나라가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위에 가담하며 정치개혁 운동에 앞서다 5·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국가반란을 기도했다는 죄로 3년간 옥살이를 한다. 출소 이후에는 ‘정치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묶여 군사정권의 감시와 탄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손발이 묶인 무위당은 종교와 사회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있는 공동체운동가로 변모한다. ‘공동체운동’은 교육 사업이면서, 정치개혁이며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정권의 감시 속에서 천주교 원주교구장인 지학순(池學淳), 시인 김지하(金芝河) 등과 함께 강원도 일대 농촌과 광산 지역의 농민·노동자를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하며 사회운동가로 활동한다.
1970년대 원주 지역이 반독재 투쟁의 주요 거점이 됐던 것은 장일순과 지학순이 있었기 때문인데, 장일순은 정치활동의 전면에는 결코 나서는 법이 없이 항상 뒤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민주화운동에 큰 힘을 보태던 장일순은 삶의 현장에 관심을 집중해 망가져 가는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무위당은 특별한 공식직함을 가지지 않고 봉사 정신으로 농민, 광부들을 대했고, 개인적인 유익을 구하는 일이 없었다.
무위당은 교육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신의 역할을 끊임없이 재규정했다. 1980년대에는 원주의 ‘한살림 운동’을 주도하면서 호를 ‘한 알의 작은좁쌀’이라는 뜻의 ‘일속자’로 바꾸고 산업문명으로 파괴된 자연의 복구를 주장하는 생명 사상(운동)을 펼쳤다. 장일순의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지원으로 설립된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은 현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한살림 생협’의 창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협동조합에 대한 장일순의 신념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이념과 맞닿아 있다. 만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며 사람뿐 아니라 곡식 한 알, 돌멩이 하나,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니 인간은 무릇 천지만물 한울님을 섬겨야 한다는 생각이다. 장일순에게 한울님을 섬기는 중요한 일은 ‘알뜰함’이었다.
수많은 농부의 땀과 하늘과 땅이 일체가 돼 한 사발의 밥이 나오는데, 그 밥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다뤄야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발의 밥을 알뜰하게 다뤄서 이웃과 서로 나누는 것이 무위당의 ‘한살림 정신’이다.
이처럼 장일순 선생으로 시작된 생명을 존중하고 만물을 소중하게 섬기며 함께 나누는 구체적 실천의 장 ‘생활협동조합’ 운동은 생산자와 소비자, 나아가 땅과 생명을 살리는 운동으로 발전하며 지금도 사회적으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늘 주목받는 요주의 인사였던 장일순은 생전에 글 한 편 책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시대의 주요 인물들이 무위당 장일순을 따르고 원주 집에 무시로 드나들었다. 장일순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조부 장경호 역시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고, 할아버지의 묵객 중 한 사람이었던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은 무위당 인생의 큰 스승으로 인연이 됐다.
차강 박기정에게 배운 서예는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의 장일순이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수단이 됐다. 무위당은 스승 차강으로부터 서화는 물론 스승의 선비 정신을 사사받아 예서체(隸書體)를 근간으로 소탈하면서도 편안한 글씨, 그러면서도 힘과 균형이 들어 있는 독창적인 ‘민중적 서체’를 구현했다. 유홍준 교수는 무위당의 서체를 중생체(衆生體), 풀뿌리체라고 이름을 붙였다.
최시형(崔時亨)의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일명 ‘걷는 동학(東學)’으로 통하던 장일순은 유학·노장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글씨뿐 아니라 장일순의 난은 새로운 화법으로 주목을 받는다. 서화 가운데서도 특히 난초를 잘 그렸고, 만년에는 난초 그림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내는 ‘얼굴 난초’로 유명하다.
난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의 독특한 화법인 삼전지묘(三轉之妙)는 이후 대원군을 거쳐 무위당의 스승 차강 박기정으로 이어졌는데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한 무위당 장일순의 ‘의인란(擬人蘭)’은 또 다른 경지의 난을 완성한 것으로 꼽힌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무위당의 난은 단순, 소박하면서도 다양하게 형상화한 사람의 얼굴 표정이 특징이다. 단아한 얼굴 모습을 한 꽃과 부드럽지만 곧게 선 꽃대, 휘어져 있지만 강한 생명력을 함유한 의인란은 삶의 역경을 견디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무위당의 일생과 닮아 있다.
글과 그림에 모두 능했던 무위당은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나,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선물로 주곤 했다. 글과 그림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은 누구든 원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써주었으며 단 한 번도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작품을 받은 사람이 지켜야 할 경구와 격언, 시구를 적어 줬다고 한다.
돈을 받고 작품을 팔지 않던 무위당은 한살림 운동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1988년 개인전을 가졌고, 또 다른 예외는 민주화운동과 협동운동을 하는 단체들의 ‘기금 마련展’에는 단 한 번도 출품을 거절한 일 없었다. 오히려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은 작품을 보냈다고 한다.
일생동안 따듯한 사랑을 샘물처럼 퍼 올리며 하나 된 삶과 예술로 세상 사람들과 교우하던 무위당은 모순된 세상을 아파하며 1994년 5월 22일에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씨와 그림은 장일순의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따스한 마음을 그 안에 담고서 사람들 곁에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았다.
◇무위당 장일순 약력
- 1928년 강원도 원주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 1940년 원주국민학교 졸업, 천주교 원동성당에서 세례(요한) - 1944년 배제고등학교 졸업, 경성공업전문학교 입학 - 1946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 1950년 6·25 한국전쟁으로 학업 중단, 원주로 돌아와 평생 원주에서 생활 - 1954년 원주 대성학교 설립, 5년간 이사장으로 봉직 - 1961년 5·16 쿠데타 직후 평화통일론 주장을 빌미로 3년간 옥고 - 1963년 대성학교 학생들의 한일굴욕외교 반대 운동으로 이사장직 박탈, 정치활동정화법과 사회안전법에 묶여 모든 활동에 감시 받기 시작 - 1968년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 전개 - 1971년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투쟁 운동 전개 - 1977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공생의 생명운동으로 전환 - 1983년 도농직거래 조직 ‘한살림’ 전신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 창립, 생명운동 전개 - 1988년 한살림운동 기금조성을 위해 서화전 개최(이후 5회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 1991년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 고문 - 1993년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
이현주 목사의 대담으로 펴냄 - 1994년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 일기로 영면 <저작권자 ⓒ 문화예술의전당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공연/문화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