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균 김중식 2인전 < 빛과 색의 향연 >. 사진(寫眞)을 사(寫)하다, 갤러리두인빛과 색의 향연 (2023.09.09-10.20)_갤러리두인
갤러리두인은 9월 9일부터 10월 20일 까지, 사진과 회화의 만남, 임영균과 김중식의 2인전을 개최한다. 미술평론가 황인은 “이번 전시는 단순하게 두 작가의 작품을 콜라보레이션 하는 전시가 아니라 임영균의 사진이 김중식의 회화를 깨우고 김중식의 회화가 임영균의 사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전시다”라고 소개 했다.
임영균은 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된 파리 리슐리에 국립도서관, 괴테가 근무한 독일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도서관, 독일 비블링겐 도서관,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 등 신작을 소개한다. 김중식은 임영균의 비블링겐도서관 사진 등을 원본으로 화려한 색채와 입체적인 기법으로 새로운 예술작품으로 재 창작했다.
김중식의 도서관 그림들은 그동안 붓으로 그리던 방법을 탈피하여 노즐에서 나오는 물감을 직접 캔버스에 짜서 그린다. 미술평론가 황인은 “거미의 뱃속에서 나온 액체가 공기 중에 나오자 마자 실이 되듯 가느다란 물감은 굳어서 화포 위에 거친 택스처를 형성한다” 라고 평했다.
임영균의 작품은 뉴욕 코닥 사진 박물관에서 개최된 ‘20세기 사진의 역사 전’ 에 초대 전시되었으며, 김중식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 주요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전시 서문] 사진(寫眞)을 사(寫)하다 황인(미술평론가)
두인 갤러리에서 임영균과 김중식의 2인 전이 열린다. 임영균은 사진가고 김중식은 화가다. 임영균은 괴테가 근무한 바 있는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등 세계의 유명 도서관을 섭외하여 현장에서 촬영했다. 그 사진을 원본으로 삼아 김중식이 개성적인 기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도서관은 책을 분류하여 보관하고 열람하거나 대출하는 곳이다. 책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다. 세상의 정보는 취사선택을 거친 다음 일정한 체계로 분류되고 가공된 다음 지식의 공간에 짜임새 있게 재배치되어 텍스트와 그림이 실린 책의 형태를 갖춘다. 이 짜임새(텍스처 texture)의 과정을 거친 정보를 텍스트(text)라 한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구체적인 장소에서 실재하는 사물, 실제로 일어난 사건 혹은 상상력 등을 그대로 옮기거나(寫)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일정한 지적 공간의 질서 안에서 짜임새 있게 재배치하는 일련 의 과정을 종합하는 일이다.
장소의 사건이 공간의 질서와 짜임으로 변환하려면 지각이 인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동반해야 한다. 지식의 형성 과정이 그렇듯, 책은 지각을 인식으로 변환하여 옮기는 작업이다.
사진(寫眞)은 영어로 포토 그라피다. 빛(photo)의 그림(graph)이다. 사물의 외피에서 일어나는 빛의 반사로 사진은 성립된다. 사진이란 빛으로 인해 드러나는(現, 現의 古字는 見으로 둘 다 빛이 있어 '드러나 보인다<pheno->'는 뜻) 사태만을 다룬다.
이 경우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의 대상과 그 범주가 현상(現象 phenomenon)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근대적인 의미의 포토 그라피는 저쪽에 있는 삼차원적 사물의 외피에서 반사되는 빛을 모아 이쪽에 있는 카메라의 필름에 옮기고 또 최종적으로는 인화지까지 옮겨 입체감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이차원의 형상으로 재현하는 일이다. 저쪽의 사물은 빛으로 환원되어 이쪽에서 명암과 색채로 재현된다.
재현이라고 했으나 이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동하면서 그 양상은 바뀐다. 사물과 사태가 이동하기는 하되, 재현을 위해 형상의 양상이 변화를 동반하며 이동하는 것을 사(寫)라고 한다. 지각이 인식으로 변환되어 책으로 편집되는 과정도 사(寫)의 과정을 많이 닮았다.
근대적인 사진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빛이 아닌 안료나 염료로 그림을 그렸다. 이건 포토 그라프가 아닌 그냥 그라프다. 그라프는 빛의 지각을 넘어서서 그리고 현상(現象)의 범주를 벗어나서 인식의 영역도 표현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에는 초상화를 사진(寫眞)이라 했다. 진(眞)을 사(寫) 한다. 즉, ‘진실한 그 무엇을 옮긴다’ 혹은 ‘진실되게 옮긴다’라는 뜻이 된다. 그 진실됨은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즉 사진은 지각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한 본질의 세계까지 화면에 담아내어야만 했다.
초상화를 사진으로 부르던 조선의 화가는 초상화 주인공의 신체적 외피에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사진(寫眞) 즉, 진(眞)을 사(寫) 한다는 것, 저쪽의 진을 이쪽의 화면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주인공의 인물이 중심이 되는 신체를 그린다고 했을 때, 신체의 외피를 둘러싸고 있는 형이하학적 신체인 체(體 physical body)가 아닌, 신체의 내피 혹은 내면에 숨은 형이상학적 신체인 신(身 metaphysical body)의 경지와 그 깊이를 길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임영균의 도서관 사진을 보자. 화면 속에서는 좌우대칭의 원근법이 강조되고 있다. 원근법에 필경 동반되기 마련인 소실점은 도서관의 벽에서 형성되고 있다. 우리의 시각은 벽 뒤의 어느 지점에 존재하고 있을 소실점의 좌표를 충분히 유추하고 있다. 사진가의 몸 혹은 카메라의 렌즈에서 출발하여 소실점 이전까지는 ‘장소’이자 ‘지각’의 세계다.
소실점 너머는 ‘공간’이자 지각을 벗어난 ‘인식’의 세계다. 그 소실점 너머의 세계를 도서관의 천장화가 보여주고 있다. 속계를 떠난 하늘의 세계가 천장화로 표현되어 있다. 그건 도서관이 우리의 신체와 지각이 닿아있는 지상의 세계를 초월한 곳임을 상징한다.
그건 책 속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장소성의 사물과 사태가 인식의 공간적 질서로 짜임새(texture) 있게 재배치 된 세계다. 그러고 보면 도서관은 구체적인 장소이되, 공간을 품은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임영균의 도서관 사진은 거꾸로 뒤집어도 구도가 성립하는데 그건 공간의 영역을 표현한 천장화가 중력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서관과 책이 가지는 공간성 즉, 장소성의 중력이 소거된 공간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임영균의 뉴욕 시절 지인인 사진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를 떠올려 보자. 스기모토는 카메라 렌즈를 무한대 초점 이상으로 이동시켜 초점이 흐려진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지각의 예술이라는 운명을 지닌 건, 카메라의 렌즈가 무한대 초점 즉, 소실점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기모토는 장소와 지각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진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소실점을 넘어선 공간과 인식의 사진을 시도했다.
임영균은 무한대 초점 이상으로 렌즈를 조작하지 않고 대상 그 자체에서 소실점 너머의 세계 즉 공간과 인식의 세계를 찾았다. 인식의 텍스트가 담은 책이 있고 지각의 세속을 벗어난 공간의 세계를 그린 천장화가 있는 도서관을 대상으로 삼았다.
흐릿한 초점이 아니라 60초 이상의 장노출로 초점심도를 극단적으로 깊게 하였다.
도서관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펼쳐진 미세한 사물과 사건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도서관 사진이 향하는 곳은 장소가 아닌 공간이다. 소실점을 제시하는 원근법, 천장화, 텍스트 이들을 다 갖춘 도서관은 장소는 장소이되 그 안에 공간을 품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임영균은 의도적으로 이런 조건을 다 갖춘 도서관들을 선택함으로써 렌즈가 담을 수 없는 소실점을 돌파한 인식과 공간의 세계에 닿을 수가 있었다. 프토 그라피가 아닌 조선시대의 초상화로서의 사진이 도달한 경지와 겹치는 지점의 세계다.
김중식은 마릴린 먼로, 오드리 햅번 등 대중들이 잘 아는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왔다. 그의 초상화는 광역대 파장의 빛을 단순한 픽셀로 환원한 그림이다.
픽셀은 이진법으로 환원된 세계다. 따라서 그의 초상화는 환원으로서의 초상화다. 이 세상의 어떤 유명인도 그 형상에 있어선 결국 점의 조합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초상화를 사진으로 불렀던 조선시대의 화가들은 인물의 터럭 하나도 꼼꼼하게 재현하면서 인물의 인품과 정신을 옮기려 했다.
사진의 다른 말로 사조(寫照), 사모(寫貌), 전신(傳神), 전진(傳眞) 등 있는데, 이 모두가 인물의 형이하학적 신체인 체(體)가 아닌 형이상학적 신체인 신(身)을 표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진이라는 말속에는 현상보다는 본질을 찾겠다는 초상화가의 발심이 담겨있다.
현대미술작가 김중식은 다른 방식으로 현상으로 드러난 인물의 모습인 체(體)를 넘어선 신(身)의 모습을 담으려 했거나 어쩌면 그 신(身)마저도 소멸해버린 존재의 궁극적 단위로서의 픽셀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조선의 초상화가들이 구사했던 화면을 꼼꼼하게 다 채우는 공필(工筆)을 버렸다. 대신 인물의 상은 텅 빈 공간 사이에 픽셀이라는 점으로 환원되어 이들 점의 조합으로 재배치된다. 화면 가까이 가서 보면 XY 좌표라는 균질공간(universal space)에 점들의 질서 있는 배열이 전부다. 김중식은 픽셀을 택함으로써 장소를 돌파한 텅 빈 균질공간의 경지에 이르게 된 셈이다.
김중식은 임영균의 사진을 그린다. 이번에는 픽셀 작업이 아니다. 기다란 노즐이 달린 기름통 같은 데다 적당한 점성의 아크릴을 부어 물감통을 만들었다. 붓이 아닌 노즐에서 나오는 물감으로 그린다. 거미의 뱃속에서 나온 액체가 공기 중에 나오자마자 실이 되듯 가느다란 물감은 굳어서 화포 위에 거친 텍스처를 형성한다. 그 텍스처는 무질서, 질량 등을 강화되어 텍스트의 반대방향인 신체성의 지각을 깨우려 한다. 김중식의 텍스처는 물성이 강하다.
매끈한 점으로 환원된 픽셀과는 정반대다. 촉각적이고 신체적이고 현상학적이다. 그가 과거 초상화를 구현하기 텅 빈 공간을 이용했다면 이번에는 임영균의 사진이 도달한 공간을 회화의 장소로 끌어오는 일을 맡았다. 2인 전이라고 했으되 이는 단순하게 두 작가의 작품을 나열하거나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전시가 아니다.
임영균의 사진이 김중식의 회화를 깨우고 김중식의 회화가 임영균의 사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전시다.
두 사람이 공간과 장소, 인식과 지각 이 사이를 다른 길로 오가는 듯한데 가끔은 서로 만나기도 하는 묘한 조형적 연대의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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