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브룩은 1925년 런던에서 라트비아 출신의 러시아-유태계 이민자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브룩은 그의 첫 연극 경험을 대학 극회에서 시작했다.
1943년 <닥터 파우스트>로 첫 연출을 시작한 브룩은 곧 영국 내에서 큰 명성을 얻게 되고
불과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전신인
셰익스피어 기념극장의 <사랑의 헛수고/ Love’s Labour’s Last>(1946)를 연출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고장인 스트라드 어폰 에이본과의 인연은
<자에는 자로/ Measure for Measure>(1950),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Titus Andronicus>(1955)로 이어지고,
이후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극장이 재정비된 이후에도
<리어왕/ King Lear>(1962), <마라/사드 Marat/Sade>(1964), (1966),
<한여름 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1970),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1978) 등을 공연했다.
Marat/Sade, full title: "The persecution and assassination of Jean Paul Marat as performed by the inmates at the Asylum of Charenton under the direction of the Marquis de Sade", is a play in a play, written in German by Peter Weiss in1963. Performed by the Royal Shakespeare Company including Patrick Magee (Marquis de Sade), Ian Richardson (Jean-Paul Marat), Glenda Jackson (Charlotte Corday), Clifford Rose (Monsieur Coulmier), and Freddie Jones (Cucurucu), directed by Peter Brook One of the most powerful scenes of the play depicts Marquis de Sade being whipped on his own instructions (act 1, scene 20). 변혁, 실험, 혁신이란 그의 연극 정신을 구축하다!
1962년, Peter Hall의 리더쉽 아래, 지금의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이하 RSC)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시작한 RSC와의 첫 작품으로 공연한 <리어 왕>은
기존의 셰익스피어 작품의 전형성을 깨는 작품이었다.
19세기를 배경으로 리어를 가련한 백발의 가부장적인 노인으로 해석한 이 작품에서
폴 스코필드(Paul Scofiled)는 리어를 맡아 연극에서뿐 아니라
브룩의 영화(1971년)에서도 잊지 못할 호연을 펼쳤다.
피터 브룩과 오랫동안 작품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David Hare)도 브룩의 <리어 왕>이 자신으로 하여금
연극인생에 발을 들여놓게 만든 작품이라 고백한 바 있다 (Michael Kustow, 2007).
1966년에는 베트남전에 대한 대항과 반발의 의미로 'US'를 만들었는데,
이는 ‘United States와 우리(US)’를 모두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품은 “베트남 전쟁이 이제까지 어떠한 드라마보다 더 강렬하고 심각하며
고통스런 상황임을 갑자기 깨달은 우리들의 자각과 함께 시작되었다”
(Michael Kustow, 2007: 252)는 피터 브룩의 이야기처럼 'US'는
‘개인적인 성찰과 반성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정치적 이슈를 다룬 작품’이었다.
즉흥 연기와 브레히트식 훈련법,
베트남 스님들의 초청 강의 등을 통해 이제까지의 정형화된 연극과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
이 작품은 대본조차 없이 리서치를 통해 모은 각종 자료, 책, 비디오, 사진 등만 가지고
5개월이 넘는 연습을 통해 작품을 창작해 나갔다.
브레히트로부터 축출해 낸 메소드를 기본으로 하여 RSC 배우들의 역량을
총체적으로 뽑아 만든 작품이었다.
당시 브룩은 브레히트처럼 ‘사회는 변화를 필요로 하며, 생각하는 것은 말하는 것만큼이나
그 변화에 충분치 않다.’라고 믿었고, 연극이 ‘관점과 사고의 방향을 변화’ 시키고
관습을 깨어 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Shomit Mitter & Maria Shevtsova, 2005).
브룩의 'US'는 관객과 언론의 격렬한 찬반 양론을 끌어냈고,
후에 이 작품에서 활용된 노래, 연설, 다큐멘터리 자료들을 모아
<거짓말을 해주세요-런던에 대한 영화/ Tell Me Lies- A Film About London>로 기록되었다.
연극이 존재하는 한 회자될 작품 <한여름 밤의 꿈>
1970년, 브룩은 RSC와 함께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 <한여름 밤의 꿈>을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RSC의 가장 성공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하얀 박스형 무대에 숲은 철사로 만들어졌고, 연인들은 한 옆에 놓여진 사다리를 오르내리거나
천정으로부터 내리워진 줄 위에 매달려 잃어버린 순수와 숨겨진 두려움, 감각적인 사랑을
풍자했다.
뉴욕 타임즈(Clive Barnes, 1970)는 브룩의 <한여름 밤의 꿈>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연출가가 만든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며,
“간혹, 아주 드물게, 연극이 존재하는 한 계속 회자될 그런 작품이 나온다.
작품이 좋든 나쁘든 현대 무대의 중요한 영향으로 기록될 그런 작품…
브룩이 설사 이 <한여름 밤의 꿈>말고는 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는 연극사에 한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브룩은 마법사이며 우리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라고 극찬했다.
또한 런던 타임즈 역시
“이것은 지난 2년 동안 RSC가 변화해 온 방향의 정점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브룩을 새로운 정상에 올려놓았다”고 평했다.
성공의 정점에서 프랑스로 이주, 영국 공연계에 충격을 던지다.
매년 화제작들을 쏟아내며 연출가로서 정상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브룩은
<한여름 밤의 꿈>의 대성공을 뒤로한 채 영국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브룩이 그의 성공의 발판이 되어준 영국을 떠나 왜 파리로 이주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이제껏 브룩의 여러 인터뷰나 저서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혁신과 변혁의 선두에서 언제나 실험적인 작업을 시도해 왔던 브룩에게
제도적이고 권위적인 영국의 문화 환경은 연극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 아니었다는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브룩을 파리로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브룩의 연극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비주의의 거장 구르디예프의 제자인
프랑스인 잔느 드 잘즈만(Jeanne de Salzmann)에 깊은 감화를 받은 때문이라고
피터 브룩의 전기를 쓴 마이클 커스토는 주장하고 있다.
피터 브룩은 그의 연극철학에 큰 영향을 준 구르디예프의 가르침을 소재로,
구르디예프의 저서 <비범한 사람들과의 만남/Meetings with Remarkable Men>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Peter Brook at 84세: politics, philosophy and plays
파리 뷔페 드 노르 극장과 제 2의 연극 인생
정치, 종교, 국경, 인종을 초월한 다문화적인 작품을 창작
그는 1971년 파리에 국제 연극 연구소 (Centre International de Recherches Theatrales/ CIRT)를
설립하고 새롭게 구성한 국제적인 배우들과 함께 그의 파리 이주 첫 작품으로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기초하여 테드 휴즈가 쓴 <오가스트/Orgast>를 연출했다.
브룩은 이 작품에서 인습적인 언어를 모두 버리고 <한여름 밤의 꿈>에서 시도했던
리듬과 사운드를 보다 확장했다.
배우들은 외침과 구음의 조화 그리고 언어로 통하는 의미대신 감정과 소리 사이의 관계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는데, 이는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말하는 언어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통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974년 파리 북역 뒤에 위치한, 거의 폐허가 된 옛 음악홀
뷔페 드 노르 극장(Bouffes du Nord Theatre)을 인수한 브룩은
이곳을 근거지로 제 2의 연극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1876년 개관이래 한때 대중적인 뮤직홀로서 고급 예술을 수용하기도 했으나
두 번의 세계 전쟁을 거치면서 수 없이 폐관을 거듭했던 이 극장은
브룩의 손 아래, 현재는
‘지난 100년간 가장 영향력있는 공연장(Andrew Todd, The Guardian, 2008)’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뷔페 드 노르 극장에서 브룩은 연극사에 길이 남을 수 많은 작품들을 연출했는데,
<아테네의 타이먼/ Timon of Athens>을 시작으로,
<새들의 회의/ Conference of the Birds>, <마하바라타/ The Mahabharata>,
<템페스트/ The Tempest>, <양복/ Le Costume>, <햄릿의 비극/ The Tragedy of Hamlet>,
<저 멀리/ Far Away>, <크리슈나의 죽음/ La Mort de Krishna>,
<티에르노 보카/ Tierno Bokar> 등의 명작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최고의 걸작 <마하바라타>로 세계 공연계를 놀라게 하다
특히, 1985년 아비뇽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아비뇽에서 14킬로미터나 떨어진
옛 채석장에서 9시간동안 공연한 인도의 대 서사시 <마하바라타/The Mahabharata>는
긴 공연 시간과 스케일, 신화와 기적, 성서보다도 열 다섯 배나 길고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합한 것의 여덟 배나 긴 원작 안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엮어내는 초월적인 상상력,
그 안에 담고 있는 종교관과 세계관 등에서 많은 화제와 격렬한 찬반 논쟁을 일으킨 작품이었다.
브룩은 ‘자연마저도 이젠 피터 브룩의 연출 아래
있는 듯했다(Michael Billington, The Guardian, 1987)’라는 열렬한 찬사를
끌어내기도 했으나 동시에 모호한 해석과 서구인의 시각으로 본
‘문화유산의 절도’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Michael Kustow, 2007: 404).
그러나 <마하바라타>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아비뇽에 이어 스위스,
영국, 뉴욕(BAM) 등 세계 여러 곳을 투어했고,
나중에는 브룩이 연출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 어떠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6개국 25명의 배우가 공연한 이 작품은 거부할 수 없는
브룩의 걸작이자 동시에 브룩의 지난 연극 인생의 여러 요소들을 집약시킨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작품화
브룩은 <마하바라타> 이후 초대형 스케일에 집중하기 보다,
사무엘 베게트의 <행복한 나날/Happy days>, <단편들/Fragments> 등의 작품이나,
<템페스트/Tempest>, <햄릿의 비극/Tragedy of Hamlet>, 등의
셰익스피어 탐구 등을 계속했다.
특히 남아프리카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보여왔는데,
남아공의 백인 작가의 작품을 흑인 배우 2명이 공연한
<일어나라 알버트/Woza Albert>를 시작으로
<양복/Le Costume>, <티에르노 보카/Tierno Bokar>,
<쉬즈반지는 죽었다/ Sizwe Banzi is dead>,
<11 그리고 12/Eleven and Tweleve> 등의 작품들을 연출했다.
* 원본 사진 및 관련 동영상 -> http://www.lullu.net/data/lullu_net/bbs/view.php?id=inform01&no=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