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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 이었습니다 > - 꽝

추동 | 기사입력 2021/04/11 [08:39]

< 그것은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 이었습니다 > - 꽝

추동 | 입력 : 2021/04/11 [08:39]

▲ 그것은 목탁 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 문화예술의전당

 

기대를 갖고 가서 봤던 연극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꽝이다.

 

입구에서 작가이신 이만희 선생과 인사를 하고 좌석에 앉았다.

 

오늘은 유난히 단체관극이 많다.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일반관객들은 반응이 점잖다.

 

점잖은 반응은 연극 보는 맛이 덜하다는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단체로 온 관객들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 둘 사이의 관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럴 수 있고 저럴 수 있다는 말이다.

 

단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지금 이 작품이 깊이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그의 두 권의 작품희곡집에서도 말했듯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작품이다.

 

즉 ‘불가에 큰 짐을 지고 있는 기분이다’라는 짐을 지며 쓴 작품이다.

 

 

이만희 선생의 작품 특색 중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 제목과 같은

 

‘내가 그 때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런 결과가 왔다’는 것과

 

‘길은 두 길이지 꼭 한 길만이 능사가 아니다’는 깨우침이다.

 

 

이만희 선생의 작품 중 내가 연극으로 직접 본 작품은

 

<용띠 위에 개띠> , <불좀 꺼 주세요.

 

<아름다운 거리>, <피고지고 피고 지고>, <돼지와 오토바이> 등이 있다.

 

 

그렇지만 선생의 작품집은 모두 희곡으로 읽었고, 특별히

 

<돼지와 오토바이>에서 느낀 생각과 감상으로

 

현 극작가들 .....‘이현화 선생님’ , 이강백 , 오태석 , 이만희 선생을

 

중심으로 한국연극과 한국 희곡 그리고 문학과 공연예술과의 사이를

 

많이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극작가 이만희 선생의 특징은 좀 더 대중적이지만 말해지는 내용은

 

다소 심오한 경지를 달리고 있다는 점에서 퍽 관심을 끌고 있고

 

극의 모든 이야기들이 경험과 같은 살아있음에 감탄하며 느끼고

 

전율하며 선생의 모든 것을 취하기 위한 준비로 절로 의관을 늘

 

갖추게 된다.

 

 

 

개인적으로 많은 연극을 보고 있지만, 언제나, 늘 이번 작품의

 

연출가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없을 정도가 아니라, 그 가벼움에 늘 혀를 내두르며 극장을 빠져나오게

 

된다.

 

 

이번 작품에서도 연출가는 극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본 가부키식 무대를

 

그대로 공연에 적용했다.

 

좌측은 주인공이 혼자 자문자답하고, 극의 주인공이 거처하는 자리로,

 

중간은 조연들과 극의 중간부분에 지장회가 하는 일을 하는 법사의 자리로,

 

우측은 주인공들의 선대 스승이 있는 자리와 , 주인공의 상념의 분신이자

 

아내의 비밀이 파 해쳐지는 장소로 구분되어 사용하고 있다.

 

 

좀 더 사실적인 등장인물들의 실재감이 나타나야 할 부분에선

 

장난스럽게 목탁과 염불을 그만두거나, 그치고 있고,

 

향도 사르지 않고, 제단에 양초에 불도 붙여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조각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대사에서 소개되지만

 

관객이 그 주인공의 전직이 조각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극 속에서 한 번도 보여 지지 않는다.

 

 

결국 신뢰가 가지 않는 말 뿐인 주인공인 셈이다.

 

그것에 비해 작가가 안배하고 마련한 불교의 심오한 가치와

 

사상 그리고 직접 작가 자신이 체험했던 경험의 무게가 실린

 

비중 있는 대사는 마치 텔레비전 개그 콘서트 대사처럼

 

공중에 풀풀 날리고 있다.

 

 

이러니 어찌 연극이 제대로 식견 있는 관객들에게 먹힐 수

 

있겠는가?

 

 

대충, 대강 대강은 이제 한국연극에서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영화뿐만 아니라 비디오의 발전과 게임 소프트의 발전과 토요일의

 

휴일을 즐기는 인구가 많은 요즘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그러한 시늉과 흉내 갖고는 모처럼 찾은 극장의 분위기를

 

저해하게 되는 것이다.

 

 

극작가 이만희 선생의 배려와 높은 대중성을 개그콘서트와

 

엿바꿔 먹으면 되지 않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쓴 약을 먹이기 위한 , 깨달음의 작가 자신의

 

고통 끝에 얻은 경험을 진실 되고, 알려주고 배워주고 일깨워 주기

 

위해 단 약으로 감 싼 ‘당의정’ 부분이란 것이다.

 

 

그것을 단지 말장난 같이 , 공중에 풀풀 날라 가 버리는

 

개그 콘서트 웃음으로 그냥 치부해 버리려고 한다면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피나는 고통과 뼈를 깎는

 

인내 속에 얻어진 가르침은

 

전혀 담겨지지 못하는 휘발성 가르침이 되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극작가 이만희 선생의 작품 중 일관된 가르침은

 

하나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착각과 절대성에 기인한다는

 

문제점을 깨달았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첫 사랑의 그녀가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고통과 고통 속에서 매일을 술과 신변잡기로 지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난 어느 여인에게서 다시 어설픈 첫사랑을

 

뛰어넘는 진실하고 귀중한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과 같다는

 

비유일 것이다.

 

 

이만희 선생의 작품 중 <돼지와 오토바이>에서 내가 느낀 점과

 

이번 <그것은 목탁구멍속의 작은 어둠 이었습니다>라는 작품의 방향과

 

기조가 같다는 점이다.

 

 

그때 당시에 생각할 땐 그것이 없으면 난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에서 생각하니 그것은 참 어리석었습니다.

 

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을 할 수 있겠고,

 

‘갇혀있다’라는 말과도 연결이 되고 있겠다.

 

 

배우들은 머리를 스님처럼 깎고, 스님처럼 경지에 다다른

 

대사를 하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일반 대중이 스님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 깊이와 진중함이 모자란다.

 

 

그것과 함께 연출의 연출적 처리는 사실적이며 보다 효과적인

 

직접적인 실증의 처리를 해 주어야 할 부분에서 편하게 배우들을 편하게

 

해주며 넘어간다.

 

 

결국 관객은 그러한 연출의 연출적 처리와 함께 진중함과 깊이가 어딘가

 

모자란 배우들의 꾸며내기 연기를 통해 이 작품이 연극이라는 사실에서

 

집중과 몰입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에 비해 또 극작가가 배우를 통해 말하고 토해내는 경험이 담긴

 

목소리는 모두 사전 연출적 처리와 배우연기에 의해 하공 속에 부르다

 

마는 공허한 목소리를 내게 된다.

 

 

신경질이 날 정도로, 짜증이 날 정도로 작품과 연출에 의한 무대 구현

 

사이에 긴 거리가 있다.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찾아서 연출과 작가의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더욱이 무엇보다 자신의 경험에서 깊이 우러러 나오는 작가의 마음을

 

식견 있는 관객들은 대사와 상황을 통하여, 그리고 보다 대중적인

 

작품을 지향하는 이만희 극작가의 극작 기법에서 보다 쉽게

 

읽어낼 수 있다.

 

 

그 후 식견 있는 관객들은 그것에 의한 , 그것이 무대에서

 

이뤄지는 과정을 연출의 연출적 처리를 통하여 맘껏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가는 전혀 작가를 배려하고

 

작가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연출적 처리로 일관하며

 

오히려 작가의 배려를 맘껏 연출적 처리가 방해하고 있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첫 장면에서 나왔던 기인한 불상,

 

대사에서 주인공이 만들었다던 그 불상의 모습과 마지막

 

주인공의 상념과 같은 분신이었던 귀신의 앉아 포즈를 취한

 

마지막 모습이 전혀 틀리다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 갖는

 

연출적 처리가 잘못 된 점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김동리 선생의 <등신불>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는

 

독자였다.

 

학교과정에서도 나온 ‘등신불’은 모든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절로 그 작품을 마지막 부분에 가서 생각하고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여 첫 장면에서의 극중 주인공이 만든 작품의 기이한

 

불상과 마지막 분신이 이야기했던, 포즈를 취했던 그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인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과정 중에 나왔던 모든 배우들의 연기와 시늉과 모습만 흉내 낸

 

것을 ‘연극적 약속’으로 규정한다 해도

 

마지막과 그 시작의 불상의 서로 다른 모습은 이 작품이 갖는

 

작가와 연출에 의한 서로 다른 거리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은 그런 점에 대해 수긍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니 감정이입조차 할 수 없으니 그저 라디오를 듣는

 

청객처럼 귀만 열고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공연이 아닌 문학작품의 희곡을 듣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 중 주인공 자신의 괴로움과 상념의 분신 역할을

 

하신 배우의 연기가 그나마 타는 목마름 끝에 단 비를 내려주는

 

희곡과 공연사이의 갭을 가득 채워주고 있는 참 좋은 연기였다.

 

 

 

드라마트루그는 뭘 하고 있었는지?

 

조연출은 뭘 하고 있었는지?

 

눈 내린 산길을 걸었던 스님들의 신발엔 진흙과 눈이 안 묻는 법이구나.......

 

내가 자주 찾아가는 양산 그 청봉 형님이 계신 그 절과

 

상도동 백운암에 차를 타고 올라가도 언제나 내 구두 위엔

 

속세의 때처럼 진흙과 눈과 비가 묻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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