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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연극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큰 연극 < 우는 달의 마음 >

추동 | 기사입력 2021/04/11 [10:39]

내가 본 연극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큰 연극 < 우는 달의 마음 >

추동 | 입력 : 2021/04/11 [10:39]

'광오하다'는 말을 자주 쓰지 않는 나는, 케케묵은 서랍 속에 묻혀있던

 

먼지를 뒤집어 쓴 '광오하다'라는 낱말 하나를 꺼내들고

 

일본 극단 月光舍(겟코오샤), 고마츠안리(小松杏里)의 작/연출로

 https://ja.wikipedia.org/wiki/%E5%B0%8F%E6%9D%BE%E6%9D%8F%E9%87%8C

 

2002년 5월 17일∼ 5월 19일까지 명동 창고극장에서 올려져,

 

두 번을 연 이틀에 걸쳐 연속적으로 감탄과 찬사,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봤던 <우는 달의 마음>에 붙여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고마츠 앙리, 달토끼, 고마츠 안리,일본 극단 月光舍(겟코오샤), 고마츠안리(小松杏里), 공연당시 포스터, 소개서는 연극클럽 '무서운관객들' 자료실에 있습니다.     ©문화예술의전당

 

<우는 달의 마음>

 

'달이 운다'는 관찰자 시점과는 달리 <우는 달의 마음>은 피관찰자인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달'의 마음일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된 상황과 놓여진 입장차이에서 오는 '역지사지'가 바라보는

 

관찰자인 '달'과 '바라다 보이는 관측의 대상인 피관찰자인 '인간'관계 속에

 

녹아져 있는 단어인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다'와 사물을 '응시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다른 말이다)

 

'육체와 예술의 저자'인 피터 브룩스는 그의 저서에서 '보봐르 부인'의 예를 들며

 

'전통적으로 창문은 거울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한 사실적 시각을 나타내는

 

대표적 은유물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그의 책에서 '여기에서 창문은 양쪽방향으로 작용한다.

 

엠마는 바깥을 내다보는 동시에 남들의 안을 들여다보고 또한 그 안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그녀는 관찰 장소인 유리창을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삼으려

 

한다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정통적인 대표주의적 은유물인 '거울'과 '유리창'을

 

떠나 ,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를 생각하고,

 

다시 고마츠안리(小松杏里)의 작/연출작품의 제목인 <우는 달의 마음>을 생각하면

 

'달'과 , '창문'과 '유리창'이 갖는 차이/구분/차연/구별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은유물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거울'과 '유리창'은 그것이 갖는 한계성으로 '개인'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것에 반하여 '달'은 - 그것이 '우는 달'이건, 짖는 달이건, 생각하는 달이건

 

유혹하는 달이건, 그건 상관없다- 탈 개인주의적인 전체의 생각이며,

 

전체가 갖는 공통의, 보편타당성을 '거울'과 '유리창'에 비하여 쉽게 부여받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달'은 그냥 '달'인데, 그것을 보는 사람의 관점, 상황, 놓여진 입장에 따라

 

모두 '달'이 '우는 달' , '짖는 달' , '생각하는 달' , '유혹하는 달'로 달라져 보인

 

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원효 큰스님의 가르침이 생각나고,

 

지족선사에 의한 '문딩이 짜쓱, 달을 카르 켰으면 달을 봐야지 어쩌자고 넌

 

아직도 내 때 낀 손가락만 보고 있노~ 하산하지 말고 밀린 빨래나 마저 해라~'

 

라는 불호령의 말씀이 들리는 것도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가 갖는 광오함 같이

 

일본에서 건너온 이 연극작품은 그 내용 면에서, 형식의 다양함에서,

 

배우들의 연기와 무대에서 사용된 각종 다양함의 연기술과 연출의 처리 면에서도

 

대나무 돗자루 예닐곱 개만으로 빈 허구의 공간무대를 꽉 채워준 채

 

시종일관 진지하고, 광오한 내용과 메시지전달이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시작하는 아이들의 '옹알거림'과

 

같은 수준의 단어들로 객석을 향해 뿌려질 때,

 

 

나는 머리를 빢빢 밀고 싶은 충동과(이해는 되지만 명확한 큰 뜻을 더 잡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머리 속에서만 동동거리며 잡혀주지 않는 그 안타까움에서)

 

귀를 잘라 질겅질겅 씹어 먹거나, 마치 무협지처럼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쳐서

 

골을 빠개 뇌수가 철철 넘치면서 동시에 '와~' 하는 깨달음을 얻을 것 같은

 

잔인한 충동을 심정적으로이길 수 없었다.

 

 

"너무 많은 뜻이 담겨 있는데, 그것은 '달'에 가 있고, '달'은 보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달라 보이니, 내가 생각한 것이 맞다할 수 없고, 그렇다고 보편타당성으로

 

굴복하여 말하기는 싫고....."

 

 

개인적으로 그 내용이 갖는 스케일에서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크고 넓은 내용의

 

연극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냥 쉽게 생각하여 말하면

 

"이 인간세상이 여같고 조(?ㅅ +ㅈ 탈락)같기에 달이 울고 , 나는 그 달이 우는 마음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투르게네프 언덕 위에서...............' 라고 말하면

 

더 폼 날련 지 모르지만, 그건 사기다. 거짓이다.

 

 

'안 받았다'하고는 나중에서야 '받았다'고 말하는 요즘 이들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이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소품은 '후레쉬' 하나 뿐이다.

 

밤을 걸어갈 때나 뛰어가거나 엎어지거나 날아가거나 뭐 여튼 그런 밤을

 

갈 때 자신의 앞길을 비쳐줄 '후레쉬'가 그가 이 작품 속에 사용한

 

소품의 하나이자, 전부이다.

 

 

어이 저기 통통하게 엉덩이에 살오른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하여튼

 

불러주면 좋아하는 '아가씨! 거기 말좀 물읍세다,

 

내가 밤길을 가는데 휘레쉬가 더 좋을까? 대보름 달빛이 더 좋을까?'

 

라고 물어봤다면 그건

 

'나 불렀수 젊은이~ 야 임마, 너 몇 살 쳐 먹었어! 새카맣게 나이도 어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그건 보나마나 물으나 마나 입만 아프고, 이고 지고 가는 저 노인네의 짐까지

 

들어주며 입 큰할머니의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의 그 소리를 또 들어가며

 

산길을 걸어가며 "야, 밤길엔 후레쉬 보다 달빛이 참 좋구나............"하고

 

어렵게 깨우칠 것이다.

 

 

'후레쉬'는 단지 자신의 발 앞길만을 비출 뿐이다.

 

그러나 '달빛'은 온 지구, 삼라만상을 두루 비쳐준다.

 

그것도 전지나 밧데리나 충전하지 않고서도, 돈도 안 받고....

 

 

작가의 이번 작품 <우는 달의 마음>은 어제보고 또 오늘 본 특이하고

 

귀중한 작품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연 이틀에 걸쳐 두 번 연속하여 같은 작품을 봤던 연극이다.

 

작가는, 우선 나는 작가가 글을 쓰게 된 동기여부를 생각하게 됐다.

 

그 버릇은 그림을 읽고 해석할 때 그 방법 그대로 쓰기로 했다.

 

나는 그림 앞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그림을 노려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이 오랜만이야, 근데 넌 왜 거기 있니?'

 

그렇게 말을 걸면 십상은 "야 임마 내가 너 친구냐?' 하는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 순간을 잘 참고

 

'그래? 대화하기 싫으면 그냥 난 널 쳐다보기만 할게' 하고 그냥 쳐다보다

 

천천히 의지를 갖고 , 불타는 적의로(비슷하지만 이건 아니다) 녀석을 응시

 

한다.

 

-쳐다보다는 말과 응시 하다는 말이 여기서 이렇게 틀려져 사용된다-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점점 그 그림이 커지고, 나는 내 의지에 의해

 

그 그림 속 어느 부분을 마치

 

원래 한 그림 속에 그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과 같은 , 이야기나 에피소드에 주제가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일컬어 말하는

 

'심연에 넣기 (mise-en abyme)'의 구실이 되어져

 

'망원경'에서 '현미경'으로 순간 순간 빠르고 적절하게 변화하며

 

그 녀석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분석하고 나름의 결론을 입력과 과정

 

그 결과가 같은 결과로 나오게 되는지에 관해 계산하여 마지막으로

 

그 결과가 입력과 과정에 조금도 오차가 없을 때

 

'어이 친구 그럼 잘 있게!' 하고 휑하니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아까 그렇게 홀대하고 박대하던 그 녀석은 내 발걸음을 멈추는

 

'여보게~' 하는 소리와 함께 가려는 나의 허리춤을 잡고 놔주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자주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놀부가 매달리는 흥부를 매트에 내다

 

꼽듯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니 가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4부작'과 같은 출발을 하고 잇다.

 

'어린아이, 청년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과

 

'미성숙'이 성숙함으로 가는 과정과

 

'개인의 주관적 생각과 일방적 자기 주장이 결국 사회와 집단과 전체를 알고

 

온 인류를 알고 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하얀 백지 위에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건 그건 그리는 사람의 마음대로이지만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은

 

그 백지 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울고 있는 것'이고,

 

작가는 그 우는 달의 마음을 다시 읽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그의 프로그램 중 그의 글에서 유독 저 달은 동양에서 보는 달과 같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보는 달의 모습과는 또 다르다고 강조하며 우리와 친근한 달임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두 그룹에서 언제나 , 언제나는 아니고, 징기스칸이 있었으니...

 

동양은 대부분의 역사에서 서양에 의해 침략과 정복당하는 운명이었다.

 

또한 하얀 백지 같은 순백의 순수 위에 '정보'와 '기호'가 새겨지며

 

어느덧 우린 순백의 순수를 잃고 살아가고 자기 자신의 모습을,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것이 어느 것이던, 어떤 것이던 또한 상관없는 게 이 작품이 갖는

 

특징이자 미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기를 갖고 항상 일정하게 변화하는 '달'과 같이

 

우리도 변화하지만, 우린 그 주기와 반복성이 없고, 결국 원래 상태로

 

다시 환원되어 돌아갈 수 없다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아니, 같이 변화하고 같이 살아가는데 왜 우린 돌아갈 수 없을까?

 

돌아갈 수 없으면서도 우린 돌아갈 자신에 넘쳐 항상 변화한다.

 

 

밀란 쿤데라의 신간 소설 '향수'에서 '향수'를 그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이 그리는 마음'이라 정의했다.

 

즉 명확히 말하여 그리스어의 '알고스(괴로움)'와

 

노스토의(귀환)의 합성어인 '향수란 말의 노스탈지는

 

'돌아가고자 하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 생긴 괴로움으로,

 

향수는 '무지(ignorance)의 상태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나타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 그의 같은 책에서는 '우연, 그것은 '운명'을 말하는 다른 방식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과 같이 이 작품 속에서는 불교가 말하는 '공'의 개념과 함께

 

앙토냉 아르토의 '이중(double)'의 개념이 많이 천착되어 중요 표현 수단인

 

대조와 대비, 은유를 뛰어넘은 환유와 제유를 통해 무대에서 형상화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의 개념은 서양에서 말하는 '있고 없음'의 존재유무

 

구분.구별/차이/차연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변화함'과 함께 '반복'이라는 것을 동시 갖고 있다한다.

 

나는 불교를 종교로 갖고 있지 않기에 그것에 관해서는 더 연구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책을 빌려 일부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 개념은 명확히 이해하고, '진공'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 잘 이해하고 있다.

 

 

이 점에서 아르토가 말하는 '이중'과 불교가 말하는 '공'의 개념이 만나

 

반갑게 조우하여 악수하고 뽀뽀하고 그 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이 작품이 갖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초라한 인간으로 세상을 알게되었을 때

 

자신이 보고 배우고 익히고 남에게 선생에게 들어 알고 있던 것과 자신이

 

직접 사회 속에 뛰어들어 직접 몸과 발품을 팔아가며 알아본 결과치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최초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는

 

분노와 광기로 표현하여 난교를 일삼는 비정상적인 섹스로 표현하고 있다.

 

 

문학작품에서 여자의 성기와 여자와 성교하는 행위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토마스 의사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 '아무하고나 섹스 하는 여자'에서

 

곧 그것이 '진리'이며, '진실'이란 것을 은유 하여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독자는 읽을 것이다.

 

그것과 같이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교와 섹스행위는 모두'진실 찾기'

 

라는 힘겨운 싸움으로 치환하여 관객이 보셔야 한다.

 

그것을 그냥 섹스 한다 하고.........보시면 식견 있는 관객은 되지 못하고

 

늘 줄거리로 분량만 채우거나, 아무 발견 없이 지나가는 단지 청객 뿐이

 

되지 못한다.

 

그 속에 담긴 내용과 알맹이를 직접 우물에 있는 두루박을 던져 우리는

 

길어 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보여지는 것만을 보고 있다면 발자크가 말하는 '여성과 종이는 같다'라는

 

것에 관한 차이. 구분. 구별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차이는 '흔적이 새겨지는 곳'이란 공통점이 존재하고 있음도 더불어

 

기억하여야 한다.

 

우스개 소리로 남녀의 성교행위에서 곧잘 '먹는다' 라는 표현을

 

일부에서 쓰는데, 그것은 곧 먹고 먹힌다는 것이 곧 흔적을 남기는 행위의

 

주체와 흔적이 남겨지는 행위의 대상물이 과연 누구냐는 것의 구별에 지나지

 

않는 다른 말이다.

 

 

조지 앨리엇이 말하듯 젊은 여성의 의식이 '민감한 그릇'같다고 말했지만

 

프로이트가 말한 의미의 재구성만으로는 '도라 이야기의 부록' 만으로는

 

결국 '도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과 같이 이 작품은 갖고 있는 뜻이 넓고 스케일이 내가 본 많은 작품들

 

중에서 내용 면에서 가장 광오한 작품이다.

 

 

그 작품을 두 번 연속하여 본 것은 정녕 행운이며, 기적 같은 일이다.

 

작품이 성숙과 미성숙에 관해 '환상의 깨어짐'은 다시 쓰고 싶을 때 긴 두레박을

 

사용하여 다시 건져 올리도록 하겠다.

 

고마츠 안리 홈페이지 http://mcri21.com/sp/an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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