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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나벨 청 스토리 > - 다른 각도에서 보자! , 'FOR MAN IS NOT FROM WOMAN , BUT WOMAN FROM MAN'

추동 | 기사입력 2021/04/10 [22:05]

< 애나벨 청 스토리 > - 다른 각도에서 보자! , 'FOR MAN IS NOT FROM WOMAN , BUT WOMAN FROM MAN'

추동 | 입력 : 2021/04/10 [22:05]

 

< 애나벨 청 스토리 >는 한 여성이 251 명의 사내를 상대로 섹스를 벌였다는 그 사건에

 

서 , '어떻게 그녀는 그러한 일을 하였을까?'라는 것 보다는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라는 호기심을 기본으로 다큐형식으로 그녀를 촬영한 영화이다.

 

▲ 요즘, 널 위해 준비했어.     ©문화예술의전당

 

영화는 곳곳에서 그러한 {호기심}과 {그녀를 성적탐구감}으로 얄팍한 돈 몇푼 집어

 

주면서 그녀를 화장실 까지 따라가 일거수 일투족을 촬영하는 , 서양과 동양의

 

편견적 시각과 , 그러면서도 그런 그들 제작자들의 탐욕을 숨기기 위하여 ,

 

곳곳에서 그녀가 발하는 '너희들 뭐가 그렇게 잘났어!' , '난 여자들이 자신의

 

성욕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유롭게 표현하고 , 탐구하고 ,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그래서 내 쑈를 공개했어요' , '모두가 251명과 섹스할

 

필요는 없지만 나가서 원하는 걸 하면 당신이 정말 뭘 원해 왔는지 알게 될

 

거에요'등의 이야기를 나신으로 그는 거침없이 화면에다 쏘아준다.

 

 

그런데, 실상은 그런 그녀의 외침을 듣기 위하여 카메라는 촬영되고 , 돌아가는

 

것은 절대 아닌 것 같다. 그렇하기에 객석에 앉은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는

 

남의 일로 생각하며 담담히 , 그리고 욕을 하며 본 것 같았다.

 

내가 누구에게 욕을 했는지는 말 하지 않았다. 그건 읽는 사람이 직접 가셔서 그

 

영화를 보면서 나와 같이 , 때로는 나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그렇게 욕을

 

하며 볼 영화인 것은 사실일 것 같다.

 

여기서 [욕]이라는 것은 실제로 욕이 아니라 , 화냄 , 성냄 , 치미는 분노 같은

 

것에 오히려 가깝다는 것을 먼저 말하련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킹스칼리지 법학부를 거쳐 미국 남가주대학(USC)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여대생 그레이스 켁.

 

그는 싱가포르 출신으로 중국화교이며 , [성욕표현]과 함께 [사회의 문란을 실증키

 

위한 전도사]로써 낯 모르는 사내 251 명과 연속 섹스를 벌이고 , 그 장면을

 

영화화 시켜 이렇게 세상에 공개를 했다.

 

 

'모르는 남자 251 명과 섹스를 한 것과 , 한 사람과 251 회의 섹스를 한 것이 뭐가

 

다르지요?' 그렇게 고개를 들고 언론사의 들끓는 취재요구에 응해 대답하는

 

애너벨 청과 그레이스 켁은 사실 異名同人이다. 그레이스 켁이라는 본명을 ,

 

그가 섹스산업 혹은 포르노 영화데뷔를 하면서 예명으로 가져간 것이 에드가 알란

포우의 시에서 ' 에너벨'을 , 그리고 삼류영화 제목에서 '벨'을 가져가 합성하여

 

만든 스스로의 이름이 '에나벨 청'이었다.

 

이 영화는 그녀가 왜 이것을 찍었는가? 그리고 왜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를

 

따라 가면서도 역시 [서양의 눈에 비친 동양 한 여자의 그렇고 그런 삶을 즐거움]

 

으로 , 그래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챙긴다'는 우리네 속담을 자꾸만

연상케 하였다.

 

 

같은 동양인이어서? 혹은 , '재주 많은 여자가.....?'

 

글쎄..그러한 같은 동양인 인것은 계속 연관이 되고 있었지만 , 그녀 혼자만으로

 

이 세계의 질서와 정면대결하면서도 , '성경에 아마겟돈이 오게되면 맨 먼저 이곳

 

L.A 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영국에서 이곳으로...' 와 , '날마다 가끔 저는 제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지요. 그럴 때 저는 제가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답니다...'가 주는

 

그 에너벨 청에 관한 연민이 더 컸지 않았을까?

 

 

어쩌면 극단적 패미니즘에 젖은 사람들은 말하겠지. '그것이야말로 쑈킹이며 , 발가

 

벗겨진 남자들의 그 이기주의 그 자체야!'라고...

 

패미니즘은 아니지만, 패미니즘을 여성주의 ,혹은 여성 중심주의 혹은 그러한 말로

 

,한국 된장 토속어로 뒤바꿔 놓아도 , 역시 [패미니즘]이라는 영어 단어가 주는

 

어감은 더욱 더 강렬하며 , 그러한 [극단적 패미니즘]은 , 결국 '이 땅위에 반은

 

남자, 이 땅위에 반은 여자'라는 진리마저 '안 세어봐서 모르니 일렬로 세워 놓고

 

세어보자!' 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러한 애너벨 청의 최초의 의도한 대로 그 영화와 , 그 행위가 갖는

 

당위성이 계몽과 개혁과 변혁과 증거로써 지속되면 좋았을 것이지만...그녀 역시

나중에는 그 행위 자체를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일인지...]하는 '그 의미찾기'에는

실패한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녀 역시 그런 양코배기 서양사람에게 이용 당한 것을 느꼈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도 말하지 못할 것이 , 애나벨 청이 251 명을 상대했다면 , 서양의

 

금발머리 다른 여자는 무려 300명을 해 치우고야 말았다.

 

 

결국 그 기록은 깨어졌고 , 그녀는 최초의 '공개적인 쑈'외에는 그 가치를 잃어

 

버린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황인종이나 , 백인이나..]하면서 그 차별대우가 없었음

 

을 애써 강조하려 할 것이다.

 

 

그녀와 섹스를 하려고 줄지어 선 사내들의 무리가 카메라에 잡혔고 , 그녀는

 

가랭이를 벌린 채 스텝과 카메라 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례로 섹스를 나눴다.

 

 

줄거리는 뒤로 갈수록 그의 사생활을 밀착취재하다가 그녀의 부모가 사는 싱가포르로

 

날라간다. 급기야 그녀의 부모가 그 사실을 알게되고....

 

오늘은 공교롭게도 어버이 날 이었다.

 

 

그 영화를 사실 보고싶어 본 것이 아니었고 , <개 달리다> 시사회가 끝나고 설문지를

 

작성하는데 , 공교롭게도 그 영화가 시간이 되어 상영된 것이었다.

 

결국 , 오늘 영화 2편을 보고야 말았는데, <애나벨 청 스토리>는 <개 달리다>의 그

 

감동을 갉아 먹고야 말게 만들었지만, 영화를 보는 계속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기에

 

별로 머리에 남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패미니즘]에서 이 영화를 생각해 본다. 친구가 유독 싫어하는 단어 [패미니즘]

 

그러나 그 단어를 차용하여 이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 그 애너벨 청이라는

 

여자가 갖고 행 했던 그 의지...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 그 녀가 싱가포르에 와서

 

자기 고향에 와서 부모님께 그 사실을 알려 드릴까? 말까? 하는 것으로 고민할 무렵

 

그녀가 카메라를 피하여 앞으로 돌진할 때 내 뱉은 말이다.

 

왜 하필이면 , 왜 그리도 당당했던 여자 그녀는 왜 그 때 하필 그 말을 하였을까?

 

 

영화는 봐야 한다. 두번 볼 영화는 아니지만 , 한 인텔리 여성이 갖는 [패미니즘]적

 

사고에서 , 교육에서 ,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모순과 비합리를 자기 스스로

 

해결과 증명해 보이려고 한 짓 혹은 일 이다.

 

그러하기에 그건 봐야만 하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나중에서야 든다.

 

 

[페미니즘]의 교육에서 , 그 녀는 미국과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최고학부의 일류

 

대학을.. 그리고 그녀는 [페미니즘]이 말하는 ,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을 위한

 

연극은 객체로써의 여성이 주체로써의 다루어 지는 여성에 있을 것이다'라는 진정한

 

여성주의 [페미니즘]의 그 가운데 선상에 위치해 있다.

 

그는 영화속 주인공이었고 , 그 기록의 주인공이다. 남자는 모두 들러리와 그 녀를

 

위한 무대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영화속 그녀의 이야기는 [페미니즘]이 말하는 '여성의 수다'에 가깝다. 수다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의미 없고 쓸데없는 지껄임'이 아니라는 서강대 장 은미

 

의 석사 논문 '여성의 수다에 관한 연구'논문에서도 밝혀졌듯이, 영화는 자기진술의

 

형식을 띠고 참고인과 증인의 (친구 혹은 주변인) 첨가로 이루어져 있다.

 

'가능성의 연극'이라는 [페미니즘]연극에서의 '새로운 詩學'형식으로 , 그녀는 무대

 

위에서 251 명의 남자와 논스톱 마라톤 섹스경주를 했고 , 그리고 그것은 다른 여자

 

로 옮아가 300명이라는 기록적 섹스로 이어지며 , 언제 다시 그 기록이 또다시 깨어

 

질지 모르게 된다. 그런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 연극의 형식이 [감추어 둠]의 연극이었다면 , 이 [페미니즘]의 연극은 그런

 

정통의 형식과는 달리 [드러냄]의 연극이다. 그 와중에 여성관객은 카타르시스와

 

속 시원함을 , 마치 내 할 말을 대신해 준것 같은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반대로 남성들에게는 여성만의 그런 비밀스러움을 {훔쳐보게}하는 탐미적 성격이

 

짙게 나타나는 문제점이 노출되는데 , 이 영화 <에나벨 청 스토리>도 그런 위험성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 심지어는 여성자체도 그런 극단적 흥미성에만 집착

 

하게되는 경향이 있다. 그거야 뭐, <에너벨 청>이라는 사람의 특정 한 사람의 특정

 

한 [경험]이라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니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 [페니스]의 존재여부로 억압과 열등감을 출발 시키는

 

이분법적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서 , 라깡과 크리스테바가 [무의식]과 [언어]에서

 

그 출발을 새롭게 되돌려 지금의 [패미니즘]에 한 이론적 기초토대를 만들었다는

 

것도 , 역시 <에나벨 청 스토리>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이 없겠다.

 

 

패니스와 팰러스의 그 차이만큼이나 , 우리가 이 영화 <에나벨 청 스토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할 것인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녀가 갖고 시고하려고 한 모든 것, 그 원천적 베이스에는 , 동양과 서양의 그

 

인종차별과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성 차별이 있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 그녀는 그러한 차별을 , 없다고 버티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희생}으로써 몸소 {증명}하려 한것은 또 아닐까?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은

 

..하는 이유도 역시 우리 죄의 사망과 구원이라는 차원에서 해석이되고..

 

{희생}과 {증명}... 예수님의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단지 그러한 다름

 

과 차별로써 <애나벨 청>을 매도하기에는..

 

그와 같지는 않지만...

 

 

결국 '쟌다르크'와 같이 , 그녀의 최후와 같이 결국 <에나벨 청>은 어쩌면 작은

 

자기 몸뚱아리 하나로 전 세계의 남성우월 지배적 가부장 체제 하에서의 여성의

 

그런 상대적 차별과 , 동서양의 인종 차별과 , 빈부의 차별을 몸소 {희생}으로써

 

우리에게 까발리고 있는 {증명}과 {증거}가 아닌지? 한 번 정도 생각해 볼 일인

 

것 같다.

 

그러나 , 역시 그것이 , 그러한 사람이 내 친구,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라는 그녀의 그 영화속 외침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영화 에나벨 청 스토리>는 그러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모든 것을 천천히 생각

 

하며 다시 볼 영화였다. 단지 보여주고 보여지는 그런 {미친짓}과는 사뭇 다를 수

 

있는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 페미니스트 연극의 어머니인 {미간테리}는 이런 말을 했다.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 그들로하여금 그것이 긍정

 

적 이미지인지 부정적 이미지인지, 아니면 자신감을 주는 이미지인지 분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페미니스트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극단적 경우로 예수님을 들었지만 , 그녀가 한 그러한 것이 한갖 인간의 여성적

 

욕망 배출과 폭로라고 매도당하기에는 , 그 이전에 숨은 그녀의 그런 {차별화}에

 

대응한 그런 것이 있었음을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페미니즘 연극은 여성을 성애의 대상, 욕망의 대체물 , 타자로 주변화 시켜온

 

연극담론에 대한 도전장이자, 여성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시학]이다 라는 말을

 

상대적 차별화로 제시하며 생각한다.

 

 

얼굴도 모르는 , 일면식도 없는 , 어떠한 정보도 없는 그 녀 <에나벨 청>의 몸

 

앞에서 나체와 벌거벗은 몸뚱아리를 자랑스럽게 (페니스를 소유함으로써 갖는 우

 

월감으로써) 카메라 앞에 내 놓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 남성들 앞에서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나는 "할 말을 잃은 것"이고 ,

 

태연히 가랭이를 벌리고 헉헉 신음대는 그러한 <애나벨 청>의 모습에서도 ,

 

그것 찍어 [신기록!]을 외치는 그 상술과 그 인종들 앞에서, 나는 '욕'을

 

하며 영화를 본 것 같다.

 

 

영화속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사건들을 모두 소화해 내기에는 , 우리네 전통 유교적

 

사고방식에 젖은 내 생각이 고루하며 , 내가 갖는 [페미니즘]에 관한 지식이 너무

 

짧은 것으로도 생각은 되지만 ,

 

이 영화 <에나벨 청 스토리>를 기존 영화코드 읽듯이 그저 지나치며 볼 수 있는

 

영화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는 그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

 

그 무엇은 천리안 연극/영화 평 쓰기 모임인 [무서운관객들]이 지향하는 [WHY?]

 

적 물음에 그 해답이 달려 있는 것 같다.

 

 

과연 여러분들은 왜 그녀가 그 짓을 , 그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 영화를 안 본 분은 말하지 마십시요.

 

그리고 , 그것을 하지 못할 분은 절대 말하지 마십시요.

 

 

밀란쿤테라의 소설중에서 의사 토마스가,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중에서

 

'아무 하고나 자는 여자'가 생각이 나는데요?

 

 

하나님!

 

그런데요....... 고린도전서 11장 3절부터 15절 까지를 읽으면? 지는마 디게 횟깔

 

리고 있는뎁쑈~ 에구, 주석성경도 본가에 가 있으니.... 우얄꼬~

 

 

흠흠..."한국판 쟌다르크 김 윤미"가 연극 <달을 쏘다!>에서

 

'남자는 여자의 자궁속에서 자아증식한 존재'라고 했었지!!!!!!!

 

고린도 전서 11장 8절에는

 

'FOR MAN IS NOT FROM WOMAN , BUT WOMAN FROM MAN'

 

 

그러나 , 이러한 위의 경우는 이 영화 <애나벨 청 스토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경우였습니다. 왜 했을까?

 

그냥 띰띰해서...... 그냥.... 끝맺음이 허슬하여 뭔가 부족하여... 그냥...

 

그냥....

 

 

그래서 그냥 여기서 덮습니다.

 

오늘 비가 내리네요.

 

<애나벨 청>이 다시 {포르노 스타}의 자리로 되돌아 갔다.......라는 끝 장면은

 

정말이지 지독하네요.

 

그래서 비 오는가 봐요.. 그렇지요? 그렇지않나요?

 

{아님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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