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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 달리다 > 하드보일드, 부조리 그리고..나트륨 등 같이. 제목처럼 빠져 있는 듯한 그 여유로움 처럼.

추동 | 기사입력 2021/04/10 [22:08]

< 개 달리다 > 하드보일드, 부조리 그리고..나트륨 등 같이. 제목처럼 빠져 있는 듯한 그 여유로움 처럼.

추동 | 입력 : 2021/04/10 [22:08]

 

<개 달리다> 라는 제목의 영화는 꼭 뭔가 빠진 제목이다.

 

'개가 달리다'던지 , '개는 달리다'던지 ..그러나 그 생략과 빠짐의

 

여유와 관객몫의 미덕은 영화 화면속에서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의 제목과 같이

 

이 영화는 시종일관 담담한 감독의 눈으로 말 그대로 [하드보일드적]

 

으로 그려져 있다. 말 그대로 '감독의 특별한 의지 투영 없이' 그린

 

것 같은 색채이지만 , 결과적으로 이 <개 달리다>는 감독의 누구보다

 

도 더 따뜻한 "안아주기식" 의지가 곳곳에 숨겨지고 , 화면으로 보여

 

진 채 시종일관 "따뜻함"으로 꽉 채워져 있다. 그러면

서도 뭔가 하나

 

제목처럼 빠져 있는 듯한 그 여유로움 처럼.

▲ 요즘,꿀 빠는 맛     ©문화예술의전당

 

{하드보일드} 와 {따뜻함}은 별개의 것으로써 서로 모순되는 창 그리

 

고 방패이다. 사실 이러한 감독의 이중성은 , 줄거리를 가져가는 그

 

시각에는 담담함이 ,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건속 중심인물들에

 

게는 감독의 그 따뜻함이 화면 곳곳에 배어나 있다.

 

아니다 , 말로 하는 모든 것에는 {하드보일드적}인 담담하고 무심한

 

시선이 , 그리고 화면 바탕에는 노란 나트륨燈의 말로 설명하지 못하

 

는 감독의 {애타는 끈끈하고 진한 인간애}가 흘러 넘치고 있는 것

 

이다.

 

 

더우기 감독은 아무 사건이 없는 밋밋한 그런 줄거리를 , "이게 진실

 

인지? 아니면 장난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코믹하게 ,

 

그리고 얼 빠지게 만들어 주고 있다. 한참 웃다 보면 그것이 {진실}

 

이라 멍~ 해지는 놀라움에 충격이 오고 , 그러다 보면 "이건 장난이

 

야~! "하는 우스개에 관객은 포복절도가 될 수 밖에 없으니....

 

 

눈 앞에 보고 있는 상황을 관객은 구분하지 못 한다. 이게 사실이야? 아니면,

 

아니면 장난이고 속임수야? 아니면 그가 하는 꽤병이야?

 

우리네 현실처럼 , 그것을 구분할 수가 없다. 시간이 흘러야 알 수 있다.

 

이 영화 <개 달리다>는 재일교포 최 양일의 작품이다. 그의 이력은 특이하다.

 

북조선의 국적을 갖고 있다 얼마 전에 , 불과 몇 년 전에 남 조선의 국적을 갖었다

 

라고 쓰여져 있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아직도 유보이고 불명이다.

 

이미 사라진 [조선]을 들먹이며 과거로의 회구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최양일의 생각이 아닌 관습일 뿐이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이 이 영화속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고작해봐야 술 마시고 , 술집 때려 엎고 , 술집 삐끼 여자 농락하고 그리고 사람이

 

죽어 있고 , 그리고 한 남자가 야큐자 사무실에서 야쿠쟈 두목으로부터 총을 맞고

 

죽어갈 뿐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문제가 개인으로 다가서면 , 그에겐 큰 일이 연거푸 두 개나 생긴 일이다.

 

직업으로 말하면 앞의 술집에서의 일과 술집 삐끼하고의 일은 별로이다.

 

그에겐 한 여자가 죽은 것이다. 자신이 사랑했었던 여자. 대충대충 사랑하고 맘을

 

주었던 여자. 그 여자가 어느 날 죽은 것이다. 교살 혹은 타살된 것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이어서 한 친구가 죽는 것이다. 그저 떠돌다 보니 악어와 악어새로서의 친구

 

친구라고 할 수 없는 친구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화면은 하드보일드적으로 아무런 사건이 없는 것 처럼 보이면서도 , 관찰자

 

인 관객의 마음에는 커다란 사건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 <개 달리다>는 남의 집 개가 달리는 것을 찍어되듯 그렇게 화면위에

 

비쳐졌고 , 그 달리는 개에 관객의 마음이 서서히 젖어들며 그 달리는 개가 측은하게

 

보여지고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개 달리다>에선 달리는 개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왜 영화제목은 <개 달리다>일까?

 

욕을 할 때 우린 개 같은 녀석...(난 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한다. 그렇게 개는 충성스러우면서도 , 또한 학대받고 자기 대접을 받지

 

못하는 동물이다.

 

거기서 달리는 사람들은 많다. 돈을 벌기 위하여 중국에서 밀항하여 일본에 온 사람

 

그도 역시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달리는 것이 개가 달리는 것이란다.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술집에 들어가 난동을 피우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우리 영화 <두 형사?>인가? 암튼 , 천보성(?> 그리고 안성기 , 그리고 그 중간에

 

누가 나왔던 영화 씨리즈에서의 그 재판같은 , 고참과 신참의 이야기가 한 사건을

 

그려내며 , 악어와 악어새를 그려주고 있다. 그도 역시 개 이다.

 

개 처럼 사는 인생이란 , 개 처럼 사는 사람들이 달리는 영화이다.

 

 

그런데 도무지 {개 처럼 살지 않는것}같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선배를 몰고가 결국

 

죽음에 까지 몰게하는 그 야쿠쟈 두목의 삶이 [개 달리다]의 그 개의 인생같은 생각

 

도 든다.

 

이 영화 <개 달리다>의 구조는 하드보일드적 추리수법으로써 전반부는 "그의 직업과

 

그의 정체는 누구인가?" 이며 , 후반부는 "과연 그녀를 누가 죽였는가?"이다.

 

그러한 그 물음이 시간을 타고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다가서며 , 사건과 사건을 이어

 

주는 연결고리 역활을 가져가며 , 결말을 생각하게 하는 것과 함께 , 왜 <개 달리다>

 

이면서 , 왜 개는 나오지 않았는가?를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절대 자기 마음속을 전부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 속고 속인다.

 

주인공 나카야마는 계속 [졸려 죽겠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실하다. 인생을 그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게 산다.

 

그는 마치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을 다 경험한 이가 마지막에 선택한 삶의 모습같은

 

그 모습을 하고 있다. 그건 고독한 극단적 수도승의 모습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어떠한 욕구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눈 앞의 일만 챙겨간다.

 

그건 , 미국 그레이 하운드 개 경주 같은 모습이다.

 

뼈다구, 모형 뼈를 향해서 앞으로 질주하는 그런 그레이 하운드의 개 모습과 얼핏

 

닮아있다. 그래서 영화 <개 달리다> 혹은 < DOG RACE>인가?

 

 

그는 무의지 , 무 욕구적 인물이다. 그러나 먹고 싸고 하고 들이키는 그 습성은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업무에 충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는 사실상 이 세계의 40대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어쩌면 40대가 아닌 , 이

 

사회의 기성세대의 위축되고 그렇지만 살아가야 하는 그런 세대를 통틀어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그런 이야기를 말함에 있어서는 철저히 냉혹한 수은 등 같은 밝지만 차가운

 

냉혹의 눈으로 , 사회의 편견적 시선으로 , 하드 보일드적 시선으로 담담히 그려

 

내고 , 화면으로는 , 감독의 마음으로는 노란 나트륨 등불 같은 어둡지만 , 다소

 

어둡지만 따뜻한 불빛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야기는 하드보일드적 , 수은 등 불빛의 시선 ,

 

속마음과 바라보는 시선은 노란 , 조금 어둡지만 따뜻한 나트륨등 시선으로 영화속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

 

 

'난 네가 좋아. 너도 네가 좋니?'

 

'나도 좋아..'

 

 

위의 대사는 3번에 걸쳐 영화 속에서 나오게 된다. 반복을 모르는 , 앞만 보고 달리

 

는 그 감독이 왜 그 대사에만 유독 반복을 사용하였을까?

 

그건 , 아마도 감독의 생각이 그 대사 하나에 녹아 응축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

 

다.

 

 

'난 네가 좋아. 너도 네가 좋니?'

 

'나도 좋아..'

 

 

여운과 , <개 달리기>식 인생의 그 허망함을 알아버린 그 단맛과 쓴 맛을 이미 다

 

경험한 인생의 최고 선배가 던지는 그 이야기 화두는 계속 머리 속을 맴 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 <개 달리다>는 눈물이 나중에야 흐르는 영화이다.

 

신나게 웃고 즐기다 보면....머리에 둔기로 맞은 것 같이 찡~ 하게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에 심장으로 전해지며 그제서야 감독이 그린 그 아픔을 관객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억지스럽지 않고 , 강조한 바 없이 그렇게 잔잔하게 가슴 속을 파고들며 강하게

 

, 나트륨 등불 같이 다소 약하지만 그 어느등 보다 더 따뜻하게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내가 전에 본 짐 자무쉬 감독의 <사무라이> 보다 한 수 위 이다.

 

설명하고 가르쳐 주는 영화 <사무라이>보다 한수 위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부조리]라고 말한 이는 알베르 까뮈의 철학용어이지만 , 그것을 연극에 대입한

 

이는 마틴 에슬린일지언데, 연극에서 [부조리]는 역시 알베르 까뮈 보다는 마틴

 

에슬린을 더 자주 이야기함은 , <사무라이>와 <개 달리다>가 말하려는 방법에서의

 

그 차이와 갖다고 생각을 한다.

 

 

감독이 갖는 가장 큰 문제.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즐겁고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가져갈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최 양일 감독은 쉽고도 즐겁게 풀어낸 영화라는

 

생각을 한다.

 

 

키시타니고로가 나카야마 역을 열연했고 , 오스키 레고가 호시야마 히데요시 역을

 

맡았는데 , 둘이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 같은 연기였다라는 생각과

 

함께 그 둘의 연기가 무척 눈에 띄인 한 편의 색다른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키타노 타케시 감독의 <소나티네>가 [부조리함 만을 강조한] 영화라는

 

것에 반하여 , <사무라이>가 설명하고 주입적으로 보여주고 음악으로 격동시킨 것

 

에 비하여 , 최 양일 감독의 <개 달리다>는 담담하고 (하드보일드 수법으로) ,

 

찐한 인간애를 영상으로 가득 보여준 수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도 자신있게 권 할 수 있는 <개 달리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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