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 그 여자는 낮은 땅에 살지 않는다 아베코보작 국내 초연 : 네덜란드 극단 '디 라 토레티' 모래의 여자 砂の女 - その女は低い地に住まないアベコボザック 国内初演 : オランダ極端 'デ−だとトレティ' 砂の女 ◈ 아베 코보 지음 ◈ 김난주 옮김 ◈ 민음사 펴냄 ◈ ---_ 그 여자는 낮은 땅에 살지 않는다 라고 번역된 책이 먼저 출판되었다 곤충 채집을 하러 떠났다가 여자 혼자 사는 모래 구덩이에 갇히게 된 남자.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혀 버리지 않도록, 그는 매일매일 삽질을 해야 하는데... 시지프의 신화를 연상시키면서, 서스펜스와 철학적 인식의 깊이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1964년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표지 중에서 -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곤충 채집에는 훨씬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신종 하나만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거의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비록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노력한 보람도 있는 셈이다. 지상에 바람과 흐름이 있는 이상 모래땅의 형성은 불가피한지도 모르겠다. 바람이 불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넘실거리는 한, 모래는 토양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어다닐 것이다.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작지 싶어서 별 생각없이 밟은 뱀의 꼬리가 뜻밖에 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뱀의 머리가 자기 목덜미에 있더라는 식의 당혹감. 물에 배를 띄울 수 있다면 모래에도 배를 띄울 수 있을 것이다. 집이란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모래와의 덧없는 투쟁에 힘을 소모할 필요도 없다. 모래에 띄운 자유의 배... 유동하는 집, 형태없는 마을과 도시... 여자를 손바닥으로 갈기면 과연 기분은 후련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어서야 상대방이 계획한 각본대로 움직이고 마는 꼴이 아닌가. 상대방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벌이란, 죄값을 치렀다고 인정하는 행위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것이 가장 안 좋아요. 그런 아이들이 흔히 있는데, 난 늘 이렇게 말해줍니다. 자기를 꾸짖는 척하지만 실은 가장 비겁한 태도라고 말입니다. 너무 단순한 듯이 여겨지지만, 목적에 부합된다면 단순함이 최고다. 열병에 걸린 아이가 시원한 은종이에 싸이는 꿈을 꾸었다. 실제로 선생들만큼 질투의 화신에게 매달리는 존재도 드물다. 학생들은 해마다 강물처럼 자기들을 타고 흘러가는데, 선생들만 그 흐름의 밑바닥 깊이 박혀 있는 돌멩이처럼 남아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일탈을 고발하는, 의심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동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소의 목에 양철 피리를 쑤셔넣은 듯한 소리로 어디선가 닭이 울었다. 물론 신문은 읽고 싶다. 풍경이 없으면 그나마 풍경화라도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풍경화는 자연 경관이 살벌한 지방에서 발달하고, 신문은 인간관계가 소원한 산업지대에서 발달한다고 어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봐야, 딱히 할 일도 없고..." "걸어다니면 되잖아." "걸어다녀요?"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무슨 그런 웃기는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마음을 열어보라고, 모를 리가 없으니까... 개도 우리 속에만 갇혀 있으면 미쳐버려." "걸어봤어요."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이곳에 올 때까지... 애를 안고, 오래오래...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참으로 묘한 논리도 다 있다. 신문기사도 별 변화가 없었다. <법인세 탈루, 시에 불똥> ... <두 아이를 교살한 엄마 음독> ... <노상강도, 두 소녀를 찌르다> ... <도쿄올림픽, 예산 옥신각신> ... <남아프리카 연방, 또 폭동, 사상자 280명>... 없다고 곤란해질 일은 전혀 없다. 환상의 벽돌을 듬성듬성 쌓아올린 환상의 탑이다. 하기야 없어서는 안 될 것들 뿐이라면, 현실은 슬쩍 손도 댈 수 없는 위험한 유리세공품이 되어버린다. 요컨대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쉴 새 없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모래는 물과 다르다... 물에서는 헤엄칠 수 있지만, 모래는 인간을 가두고 압살한다. 그는 이번 휴가에 대해서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고, 동료중 누구에게도 일부러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그저 말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수께끼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잿빛 일상에 피부색까지 물들어 가고 있는 그들을 약올리기에는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었다.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에 빠진다. "어떻습니까? 나는 인생에 기댈 언덕이 있다고 하는 교육 방법이, 도무지 미덥지가 않은데..." "뭡니까, 그 기댈 언덕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없는 것을 말입니다,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환상교육이죠."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것은, 즉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쪽이 되고 싶다는, 자기를 꼭두각시와 구별하고 싶은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죠.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어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짐은 호기심이란 방아쇠가 달려있는 폭약이다. 문명화의 정도는 피부의 청결도에 비례한다고 한다. 인간에게 만약 혼이 있다면, 틀림없이 피부에 깃들여 있을 것이다. 물을 상상하기만 해도 피부는 몇 만 개의 빨판이 된다.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하고 깃털처럼 부드러운 혼의 붕대...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몸을 던진 철책의 틈새가 실은 우리의 입구였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은 짐승... 바다에 표류하는 사람이 기아와 갈증으로 쓰러지는 것은 생리적인 결핍보다 오히려 결핍에 대한 공포 탓이리고 한다. 졌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과연 시간이 말처럼 뛰어가는 일은없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손수레만큼 늦지도 않은 듯하다. 무엇으로든 좋으니까 목을 축이고 싶다. 이대로 가다가는 온몸의 피가 죽어버린다. 결국은 고통의 씨앗을 뿌린 셈이 되어 나중에 후회할 것을 잘 알면서도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병마개를 뽑고 이빨을 부딪치면서 나팔을 분다. 그래도 혀는 여전히 충실한 집 지키는 개였다. 갑작스런 침입자에 놀라 난동을 피운다. 컥컥 숨이 막힌다. 찰과상에 옥시풀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세 모금째의 유혹을 끝내 이기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축하주다. 의무란 것이 인간의 여권이라 해도, 어째서 그런 놈들에게까지 비자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인생이란 그런 종잇조각이 아니지 않은가... 반듯하게 덮인 한 권의 일기장이다. 첫 페이지는 한 권에 한 페이지면 족하다. 앞 페이지에 이어지지 않는 페이지에까지 일일이 의리를 지킬 필요 따위 없다. 성병은 멜로드라마하고는 정반대다... 멜로드라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절망적인 병이다. - 중략 - 인류가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죽음과 성병에 한해서인지도 모른다. 다만, 정신적인 강간만은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자기를 먼저 모욕할 일이다. 놈들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갈증에 대한 공포를 미끼 삼아 보란 듯 나를 조종할 심산이다. - 중략 - 열 잔의 물이 사탕이라면, 한 잔의 물은 차라리 채찍에 가깝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 중략 -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Got a one way ticket to the blues, woowoo ~(이건 슬픈 편도표 블루스야...)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불러. 실제로 편도표를 손에 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노래하지 않는 법이다. 그들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왕복표 블루스다. 편도표란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맥락없는 생활을 뜻한다. 그렇게 상처투성이 편도표를 손에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그렇기에 돌아오는 표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이지 않도록, 죽어라 주식을 사고 생명보험에 들고 노동조합과 상사들에게 앞뒤가 안 맞는 거짓말을 해대는 것이다. 목욕탕의 하수구나 변기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절망에 차 도움을 구하는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을 듣지 않기 위해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고 열심히 편도표 블루스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하지만 명중하려면 아직 멀었다. 조금이라도 숙달된 기미가 보이면 그나마 안심일텐데 오차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피로와 초조의 간격만 오히려 좁아졌다. 아래를 보면 안된다, 아래를 보면 안된다! 등산가든 빌딩 청소부든 텔레비전 송신탑의 전기공이든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든 발전소의 굴뚝 청소부든, 아래에 신경을 쓰면 그때가 바로 파멸의 순간이다. 짓지 않는 개는 위험하다. "시간을 위아래로 흐르는 것이라 여기고 생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란 원래 옆으로 흐르는 것이라고 정해져 있어." "그것을 세로로 놓고 생활하면 어떻게 되지?" "그야 당연히 미라가 되겠지." 우선은 선전! 선전을 하지 않으면 파리도 꼬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모른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맹수가 등장하는 영화나 전쟁영화가 재미있는 까닭은, 설사 심장병이 도질 만큼 사실에 육박하는 영화라도 극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거기에는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와 거울> 마치 인간의 생활이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성립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집념이다. 과연 라디오도 거울도, 타인과의 관계를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 관계되는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동기는 특별히 없다는 거였어. 그렇다면 대체 뭣 때문에 집을 나왔느냐고 물었더니, 청년이 대답하기를, 도무지 요령을 알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는 말이었다는군. 농부란 것은, 일해서 땅을 늘리면 일거리가 더 늘어나는 셈이니까... 결국 고생에 끝이 없고, 그런 나머지 얻어지는 것은 더욱 고생이 늘어날 것이란 가능성뿐이야. 애향정신이니 의리니 하지만, 그것을 방기할 때 같이 잃어버릴 것이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대체 그녀에게 잃어버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남자는 여자 이상으로 매사의 파편이나 단편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다. 순간이란 당장에 포착하지 않으면 늦는 법이다.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돌아보지조차 않는다! 목구명 속에서 푸르르 떨고 있던 공포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짐승처럼 외친다. "살려줘." 늘 정해져 있는 말! ... 아무렴 어떠랴... 다 죽어가는 판에 개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여자는 그 어둠 속에서 어둠보다 더 어두웠다. 그렇다면, 모기의 추광성은 어떤 식으로 설명할 생각인가! ... 등잔불이 그들 종의 보존에 어떤 도움이 되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더구나 인공의 불빛이 생긴 후의 현상인 듯하다. 모기가 떼지어 달세계로 날아가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이다. 이것이 그냥 한 종류의 모기에만 있는 습성이라고 하면 그나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약 1만 종에 달하는 모기의 공통된 습성이라고 하면 이것은 엄연한 하나의 법칙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공의 불빛에 환기된 이 맹목적이고 열광적인 날갯짓... 법칙이 이렇게 무모한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대체 뭘 믿어야 좋다는 말인가? "참 내, 그것도 아주 보기 좋게 실패했어." "하지만, 순조롭게 성공한 사람, 없어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여자는 눈물 어린, 그러나 마치 남자의 실패를 변호하듯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한 친절함인가. 이 친절함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니, 너무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여자는 지난 두 달 남짓, 이제나저제나 실에 구슬을 꿰는 부업에 얼굴이 퉁퉁 붓게 보일 정도로 몰두하고 있다. - 중략 - 이렇게 반년을 계속하면 그럭저럭 라디오를 살 수 있는 계약금 정도는 될 것 같다. 그 바늘의 춤에는 지구의 중심을 느끼게 할 만큼 무게가 있었다. 반복은 현재를 채색하고, 그 감촉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고독은, 환영을 좇기에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다. 구걸도 사흘을 계속하면 그만두기 어렵다고 한다. 그런 내부로부터의 부식은 의외로 빨리 진행되는 것인 모양이다. "일본의 정신분열증 환자 수는 백 명에 한 명 꼴이라는 거야." "그런데 도벽이 있는 사람도, 역시 백 명에 한 명 꼴이라나 봐..." "호모가 1퍼센트면 레즈비언도 당연히 1퍼센트, 그리고 방화벽이 1퍼센트, 주벽이 있는 사람도 1퍼센트, ...., 살인광, 매독, 백치... 각각 1퍼센트로 치고 합하면 20퍼센트... 이런 식으로 비정상적인 경우를 80가지 열거할 수 있으면... 물론,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인간은 100퍼센트 비정상이라는 것이 동계상 증명되는 셈이지." 인내란 딱히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를 패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우리, 화분 하나 살까?" "바람에 잎이 팔랑팔랑 흔들리는 그런 나무..." 도망치고 싶어도, 뿌리와 연결되어 있어 동망치지도 못하고 팔랑팔랑 몸부림치는 잎사귀의 무리... <저작권자 ⓒ 문화예술의전당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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