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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단재 - 극단 새벽

문예당 | 기사입력 2007/07/08 [16:14]

청년 단재 - 극단 새벽

문예당 | 입력 : 2007/07/08 [16:14]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연보에 대해서  


1880∼1936. 항일독립운동가, 사학자,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 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충북 청주 출신. 한말 언론, 교육, 신민회 활동을 통해 계몽운도을 전개했다. 중국 망명 후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운동노선을 견지하면서 외교론 중심의 상해 임시정부에 비판적인 입장에서 활동했으며,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정부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계몽 운동기]
아버지는 신광식이다. 정언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에게서 한학교육을 받았고, 10세에 사서 삼경과 통감을 읽어 신동이라 불렸다.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그 해 10월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04년 6월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함께 항일성토문을 작성하여 이하영 등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신규식 등과 산동학원을 설립하여 계몽운동을 폈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저술하여 민족정신과 독립 정신을 돋우기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 참가하고, 이듬해 순한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망명활동기]
1910년 4월 일제의 한일합병 정책이 노골화되어 국내에서의 독립활동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외의 운동기지 구축을 계획한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백두산에 오르고, 남만주 일대의 고구령와 발해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광개토왕릉을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6년 베이징에서 사담체(史談體)의 자전적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했다.
[임시정부 활동기]
1918년 12월 미국 대통령 위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자, 구외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에 참가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했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했다.
[무정부주의 활동기]
의열단의 선언문을 기초해달라는 김원봉의 요청으로 1923년 민중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무정부주의적 양상이 나타난다. 1924년 베이징[北京]에서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민족통일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하였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36년 옥사했다.
[역사연구]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東國巨傑)》 《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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